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 수니파 탈레반 시아파 군사지도자 동상 폭파 수니파 Sunni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이자 정통파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인 수나(Sunnah)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원어명 Sunn'
수니파는 신의 말씀인 꾸란과 함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 سنة , 관례, 법적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랍어로는 '아흘 알-순나(Ahl al-Sunnah, أهل السنة : 순나의 사람들)'라고 하며, 이를 줄여 수니파라 칭한다. 수니파는 대체로 아부 바크르를 비롯해 선출과 충성서약에 따라 즉위한 4대 정통 칼리프를 인정하고, 4대 이슬람 법학파(法學派)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시아파 형성이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 알리(재위 656∼661) 및 그 후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에 바탕을 두었듯이, 수니파의 형성에도 칼리프 제도의 확립과 보유, 아랍 민족의 우월권 확보와 같은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였다.
간혹 수니파와 시아파를 정통 이슬람과 이단으로 구분하여 보거나 민족적·종족적 의미를 담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수니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이며, 시아파의 대부분이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므로, 이 둘을 민족적·지역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이는 현재적 상황일 뿐 영속적이지 않음을 이슬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비합리주의적인 신학을 발전시켜 갔다면, 수니파에는 일탈(逸脫)과 혁신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정통파 신학과 시대변화에 따른 합리적 변화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신학이 나란히 발전했으며, 수많은 법학자·신학자들이 등장했다.
그 대표적 신학자로 알 아쉬아리(al-Ash'ari), 알 가잘리(al-Ghazali), 파크를 알-딘 알-라지(Fakr al-Din al-Razi)를 들 수 있다. 수니파의 연구 중심지는 아바스 왕조에서는 바그다드였으나, 1258년 이곳이 몽골군(軍)에게 정복되고 아바스 왕조가 멸망한 뒤로는 카이로의 아즈하르대학교(972년 설립)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니파 무슬림은 대부분 4개의 주요 법학파 중 하나에 속해있으며, 이 법학 파는 이슬람 법 샤리아의 해석 방법과 샤리아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하나피(Hanafi) 학파는 아바스 조 초기에 이라크 쿠파에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사망한 아부 하니파(Abu Hanifa: 699~767)가 세운 가장 오래된 학파이다.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법학자들 중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성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 피파는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합리성을 추구하므로, 다른 법학 파보다 교리상의 해석에 대해 더 유연하고 그만큼 덜 엄격하다.
오늘날 하나피 법학 파는 터키, 시리아, 요르단, 중앙아시아 , 북인도, 이집트 북부 지역에서 지배적이다.
두 번째 학파는 말리키(Maliki) 학파로 메디나 출신의 이맘, 말리크 빈 아니스(Malik b. Anas:714~795)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이슬람 전승과 관행에 대한 지식의 권위자였으며, 따라서 이 학파는 꾸란과 하디스뿐만 아니라 메디나 전통과 전승에 준거하여 법 이론을 발전시켰다. 말리키 학파는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남부, 수단, 쿠웨이트, 바레인 등지에서 우세하다.
세 번째 학파는 샤피(Shafi'i) 학파로, 8세기 말에 이맘 말리크의 제자였던 무함마드 빈 이드리스 앗 샤피이(Muhammad b. Idris al-Shafi'i: 767~820)에 의해 세워졌다. 샤피이 학파는 말리키 학파의 법체계에서는 수나의 적용을, 하나피 학파의 법체계에서는 이성적 판단과 합리성의 적용을 비교적 최소화하고 엄격하게 함으로써, 두 학파의 법이론을 통합하고 절충했다.
또한 법적 쟁점에 대해서는 법학자와 신도 모두를 동등하게 포함하는 전체 공동체의 동의와 합의가 해결점이라고 여겼다. 오늘날 샤피이 학파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및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우세하다.
네 번째 정통 수니 법학 파는 아흐마드 빈 한발(Ahmad b. Hanbal:780~855)에 의해 세워진 한 발리 법학 파이다. 이븐 한 발은 법 판단에 이성을 적용하는 것은 그만큼 신의 뜻인 순수한 진리에서 멀어지고 인위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전통과 전승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적, 합리적인 것을 배격하고 하디스에 집착한 만큼 이 학파는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하며, 경직되고 관용성이 적은 법 체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 등의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식 법학 파이자, 이라크와 시리아에도 일부 추종자들이 존재한다.
시아파 Shi'a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 다음으로 큰 분파로 시아 이슬람(شيعة)이라고도 한다.
아슈라 데이
원어명
shī‘ism
'시아'는 사전적으로는 '분파'라는 뜻으로 수니파(정통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함께 이슬람의 한 갈래이며, 이 둘은 똑같이 정통 이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간혹 이 둘을 정통 이슬람과 이단으로 구분해서 보거나 민족적·종족적 의미를 담아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수니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이며, 시아파의 대부분이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므로, 시아파를 민족적·지역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이는 현재적 상황일 뿐 영속적이지 않음을 이슬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가 출현하게 된 발단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가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그를 계승하느냐에 대한 교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후일 시아파를 이루게 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족 중에서 계승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러 면에서 예언자의 사촌동생이자, 예언자의 딸 파띠 마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 알리(Ali)가 적격자로 여겼다.
그러나 칼리프 선출은 선거로 대표자를 뽑는 전통에 의해, 알리가 아닌 아부 바크르를 제1대 칼리프로 결정하였으며, 아부 바크르를 인정하지 않고 알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후일 시아파를 형성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특히 정통 칼리프 중 3대 칼리프 오스만(Uthman)에서 4대 칼리프 알리로 칼리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며 시아파가 분리된다.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 군(軍)과의 첫 전투인 낙타 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 번째 전투인 시핀 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 군이 협상을 요구했으며, 알리 진영에서는 이 협상에 대한 찬반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알리는 협상에 임했으나, 이로서 그는 군사적 손실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칼리프로서의 지위가 반란자 무아위야와 대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협상 반대파들은 알리 진영을 뛰쳐나가 '카와리지' 일파를 형성했으며, 1년 반에 걸친 협상에서 중재자들은 책략을 쓰는 무아위야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슬람 세계는 양분되고 칼리프 알리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는 카와리 지파에 의해 A.D. 661년 1월에 살해되었다.
알리의 죽음으로 힘의 균형이 무아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 위에 올라 우마이야조를 세웠다. 무아위야(재위 661~680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 위를 세습했으며, 야지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던 칼리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후세인(Husayn)은 이라크의 쿠파에서 자신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지지자들의 초청으로 메카를 떠나 은밀히 쿠파로 향했으나, 카르발라(Karbala)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충복 우바이 둘라 빈 지야드(Ubidullah b. Ziyad)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680년 10월).
이러한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반(反) 우마이야 정서가 고조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하나의 정파에서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혹은 '시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카르발라의 참극은 이슬람사에서 수니와 시아라는 무슬림 종파가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4대 정통 칼리프와 역대 칼리프 왕조의 칼리프(계승자·대리자라는 뜻)로 보는 데 반하여,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만을 정통 칼리프로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보았으며, 각 유파마다 해석이 다른 신성(神性)을 부여하였다.
시아파에게 이맘의 지위와 존재는 수니파의 평가와는 매우 다르다. 수니파에게 이맘은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이며, 칼리프는 신의 계시와 명령에 따라 종교를 보호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교 일치적 수장이다. 그러나 시아파에게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알리와 그의 후계 이맘들은 모두가 범인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다.
즉, 이맘은 무오류의 초인적 존재로서 현세 문제뿐만 아니라 샤리아(이슬람 율법) 상의 제만 문제에 대해 절대적 해석권과 판결권을 갖는다는 독자적인 교리관이 형성되어 있다. 우마이야조에 대항하는 수차례의 정치적 무장봉기에서 연속적으로 실패한 시아파는 심한 박해와 좌절을 겪으며 운동 초기부터 지하로 숨어들었다. 오랜 지하 활동으로 인해 시아파는 여러 이단적 사상에 쉽게 물들었으며, 후에 동방 기원(起源)의 이교적 요소가 다분히 혼입 되어,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그 유파는 매우 다양한데, 누구를 정통성 있는 이맘으로 여기는가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본류는 12 이맘파, 혹은 이마미 파(al-Imamiyah)라고 불리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주류이다. 중요한 시아파 교리들을 정립했으며, 12명의 이맘을 모시고 있다.
두 번째 분파는 자이디 야(Zayydiyah) 파이며, 제5대 이맘 알 바끼르의 동생 자이드를 추종하는 파로, 초기에는 적극적인 반(反) 우마이야 활동을 벌였으나 점차 교리적으로 가장 수니파에 가까운 온건파로 발전했다. 세 번째 분파는 제6대 이맘 자으파르 앗 싸디끄의 장남 이스마일(Ismail, A.D.760년 사망)을 추종하는 이스마일파로, 한때 이집트 지방을 통치한 파띠 마조가 이 파에 해당한다.
이스마일 파는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며, 그중에는 꾸란에 언급된 7명의 예언자를 중시하는 7 이맘파, 암살 교단으로 악명 높은 니 자리파 등이 있다. 이들 이스마일파 이외에도 10-11세기에 걸쳐 누사 이리(Nusayri) 파와 드루즈(Druze) 파가 생겨나 주로 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관용' 내걸었던 수니파 탈레반, 시아파 군사지도자 동상 폭파
18일 아프간 수도 카불의 도심 요새 지역인 와지르 악바르 칸 구역을 탈레반 전사들이 순찰하고 있다. 이 구역은 미국 등 외국 공관들이 있는 곳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수중을 넣은 탈레반의 전사들이 같은 이슬람 라이벌 분파의 군사 지도자 조각상을 폭탄으로 날려버렸다고 AP 통신이 18일 전했다.
폭파 대상이 조각상이긴 하지만 전날 첫 대외 기자회견에서 반대 진영에서 일한 사람들을 보복하거나 하지 않고 일제히 사면할 것이라고 밝힌 탈레반의 새 방침과는 다소 어긋나는 모습이다.
통신은 사회관계망 영상 등을 인용해 이날 중부의 바미안 주에서 시아파의 군 사령관 압둘 알리 마자리의 동상이 폭파되었다고 말했다.
탈레반은 이슬람의 다수파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수니파에 속한다. 아프간에서 1989년 10년 간의 소련 침공을 물리친 이슬람 무자히딘 전사들은 수니파와 라이벌 시아파 간에 정권 쟁탈의 내전에 들어갔다. 시아파의 사령관 알리 마자리는 수니파와의 전투에서 1996년 전사했다.
수니파의 탈레반은 즉시 정권을 잡고 수도 카불에 입성했으나 5년 뒤 2001년 12월 3개월 전에 뉴욕 테러를 당한 미국의 전격 침입을 받고 카불에서 쫓겨났다.
이날 탈레반이 폭파한 동상의 주인공인 알리 마자리는 이란이 종주국인 이슬람 소수파 시아파 지도자일 뿐 아니라 아프간의 소수계 종족 하자라족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연한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인 아프간은 서쪽으로 이란과 접하고 있으며 이란은 탈레반의 공세가 격해지자 자국과 가까운 시아파 하자라족 안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조각상이지만 알리 마자리 상이 폭파되면서 이란의 걱정이 현실화한 셈이다.
또 폭파 사건이 벌어진 바미안 주는 탈레반이 1차 정권 말기인 2001년에 1500년 역사의 산악지대 불상을 파괴한 곳이기도 하다. 딩시 탈레반은 이슬람의 우상 금지 및 파괴 가르침에 따랐다고 강변했으나 국제 사회는 값진 문화유산의 파괴를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