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부마항쟁의 원인 이란 뜻
부마 민주항쟁 釜馬民主抗爭 1979년 10월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 사건. 언제 1979년 10월 어디서 부산 및 마산 누가 학생과 시민 무엇을 반정부 시위 왜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반대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金泳三)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은 여야 격돌로 더욱 경색되었다.
이어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 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되었다.
부마 민주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으며, 2019년 9월 17일 부마 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부마 민주항쟁
발생 시기
주요 사건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 정국 여야 격돌 심화.
1979년 8월 11일
YH사건 발생.
1979년 9월 8일
김영삼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의원직 박탈.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 고조.
1979년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 사퇴서 제출.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 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 수리론' 제기.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 선언문 배포. (부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5천여 명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 전개.
1979년 10월 17일
시위대, 정치 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세무서, 방송국 등을 파괴.
1979년 10월 18일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 확산.
정부,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1천여 명 연행, 66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0일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 발동. 군사 출동하여 시위대 중 505명 연행, 59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국무총리 최규하를 중심으로 한 과도내각 출범.
윤석열 부마항쟁 논란
장제원 의원이 이한열 열사라고 해서 어떻게 그런 게 나왔는지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입당원서를 제출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저도 그거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사진이 새겨진 조형물을 보고 부마항쟁을 언급해 '역사인식 부재' 비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전 검찰총장)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윤 예비후보가 30일 국민의 힘에 입당한 뒤 연 기자회견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윤 후보가) 이한열 사진을 보고 부마항쟁을 언급한 것에 대해 비판했는데, 어떤 입장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현장에 있던 장제원 의원은 불편한 듯 "아이"라고 짧게 말하며 인상을 썼다.
윤 예비후보는 "당시 (제가) 27살이었고, 저희 집도 연세대 앞이었다. 도대체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제 나이 또래에 누가 있겠나. (제가 이한열 열사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답했다.
그가 지난 27일 부산 민주공원을 방문해 1987년 6월 항쟁이 기록된 공간 중 이한열 열사 조형물 앞에서 "이건 (1979년) 부마(항쟁)인가"라고 질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인 데 대해 이렇게 해명한 것이다.
윤 예비후보는 장소 배경과 당시 현장에 동행한 장제원 의원 탓으로 돌리는 듯한 해명을 내놨다.
"다만 (부산 민주공원에는) 부마항쟁, 6.10 항쟁 (등) 주로 부산·마산 지역 항쟁에 관한 조각과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관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그 장소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장제원 의원이 안내해주면서 '이한열 열사'라고 해서, 제가 처음에 부산·마산 지역 항쟁인 줄 알아서 서울대, 연세대 앞(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장소)은 생각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장 의원이) 말씀해 제가 '맞네요'라고 하고, 부마항쟁, 6.10 항쟁 얘기를 나눴는데, 그런 게 어떻게 나왔는지 저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를 방문, 장제원 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윤 예비후보는 지난 17일 광주에서 이한열 열사 묘소를 참배한 뒤 "1987년 당시 대학원생으로 연세대 앞에서 살고 있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장면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전후 상황은 아주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윤 예비후보가 이한열 열사를 묘사한 조형물을 보고 부마항쟁 이야기를 했으니 비판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용기 이재명 캠프 대변인은 30일 논평에서 "1987년 '6월 항쟁'과 1979년 '부마항쟁'의 차이를 진정 모르는 것인가"라며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분들에 대한 추모와 존중은 없고, 자신의 대선 행보를 위한 연출의 하나로만 여기는 행보는 매우 유감스럽다"라고 힐난했다.
장경태 정세균 캠프 대변인 역시 "지난 17일 5.18 국립묘지를 방문한 윤 예비후보는 이한열 열사 묘역을 엄숙하게 참배했다"며 "이한열 열사를 잊은 건지, 아니면 이한열 열사가 누군지도 모른 채 5.18 광주 묘역에서 참배를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김두관 대선 예비후보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느라 부마항쟁도, 6월 항쟁도 도서관에서 맞았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인의 평균치 상식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