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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재방송 다시보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군주 가계도

리베로수 2021. 7. 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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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재방송 다시 보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군주 가계도 벌거벗은 세계사 엘리자베스 1세 여성 군주의 삶 파헤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열일곱 번째 여행으로 영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시간을 갖는다.

3주 연속 시청률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는 ‘벌거벗은 세계사’는 지난 22일 방송에서는 수도권 가구 기준 3.8%, 최고 4.4%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좋은 기세를 이어나갈 29일(화) 방송되는 17회에서는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윤영휘 교수가 강연자로 나선다.

 

윤영휘 교수는 미국교회사협회가 선정한 시드니 미드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법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역사를 보는 ‘주목받는 젊은 역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연구하면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들, 역사적 교훈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윤 교수는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꽉 찬 시간을 예고한다.

 

이날 방송에서는 태양이 지지 않는 ‘영국 제국’의 시작을 연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것을 재조명한다. 그녀의 출생의 비밀, 목숨마저 위태로웠던 어린 시절부터 고된 역경을 딛고 존경받는 군주가 되기까지 불굴의 여왕으로 우뚝 선 엘리자베스 1세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한 밀당의 고수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외교 정책의 비밀을 알아보고, 다양한 능력을 통해 여성 군주라는 당시의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한 정치 전략에 대해 알아본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에 대해서도 낱낱이 파헤친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여왕과 해적의 은밀하고 과감한 거래를 둘러싼 이야기와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가 세계를 제패한 비결까지 모두 공개된다.

 

 ‘캐리비안의 해적’, ‘해적 여왕’ 등 듣기만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며 MC 은지원, 규현, 이혜성의 집중도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는 후문이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교수님도 감탄하게 만드는 MC군단의 역사 감각 또한 세계사 여행의 재미를 더할 전망.

 



 

 


여기에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사 여행을 풍성하게 만들 게스트가 출격한다. 북극점에서 남극점까지 자동차 없이 무동력 완주한 오지탐험가, 영국인 제임스 후퍼와 스페인에서 온 한국 역사 마니아, 가브리엘 루이스가 여행 메이트로 나선다. 각각 영국 사람과 스페인 사람으로서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생각과 스페인 무적함대의 의미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엘리자베스 1세


대영 제국의 처녀 여왕

 Elizabeth Ⅰ 

 

출생 - 사망
1533년 ~ 1603년


재위 기간
1558년 ~ 1603년


지역
영국


왕조
튜더 왕조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빅토리아 여왕 등 여왕이 즉위하던 시대에 더욱 번영을 누렸다. 여왕 신화의 첫 주인공 엘리자베스 1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허와 실 - 전설의 여왕의 정체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광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녀의 소녀 시절은 여러 번 런던탑에 갇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는 공포와 굴욕의 나날들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태생 - 서자의 신분으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에게는 6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의 이복자매 메리였다. 캐서린은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헨리 8세는 그녀와의 이혼을 희망했다. 그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교황과 크게 다툰 끝에 마침내 국교회라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두 번째 왕비 앤 블린이 낳은 딸이 엘리자베스였다. 앤은 캐서린처럼 아들을 낳지 못하고 간통 혐의로 처형당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서자(庶子)'로 취급되었다. 헨리는 그 후에도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아들은 병약한 에드워드 한 명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이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교사에 말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는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는 몇 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가 즉위했지만 불과 9일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헨리 8세의 장녀 메리가 다시 즉위하였다. 엘리자베스가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종교 대립 - 분열된 나라
엘리자베스의 즉위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에 의해 구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국교회)가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언니 전(前) 여왕 메리 1세는 구교를 신봉하고 신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였다. '블러디(Bloody) 메리'라 불릴 정도로 혹독한 탄압이었다.

신교도들은 메리 치하의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망명했다가 엘리자베스가 즉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가톨릭은 서부·북부에서, 신교는 동부·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고 영국 국내는 두 동강이 났다.

투옥 - 런던탑으로
메리가 즉위하고 곧 '와이엇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 자체는 비교적 빨리 진압되었지만 주동자가 고문 중에 "이 반란에는 엘리자베스가 관련되어 있다"는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엘리자베스는 즉시 붙잡혀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그녀는 결백을 주장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가 관여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반란 주동자가 처형 직전에 엘리자베스는 결백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다.


그녀는 에드워드 6세가 건재했을 시절에도 반역자 토머스 시모어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취조를 받다 풀려나기도 했다. 이처럼 불우한 소녀 시절의 경험은 그녀를 조심성 많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군주 가계도

 

 

 

즉위 - 신에게 선택받은 여왕
1558년 11월 17일, 엘리자베스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죽은 언니 메리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의회가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승인했을 때 그녀는 "위대하신 신의 조화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려운 나날들을 견뎌 온 엘리자베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국교의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여왕은 세속 상의 사항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종교상의 사항에 관해서도 영국의 유일한 통치자다'(국교 지상 법)라고 하며 로마 교회·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표명했다. 이렇게 성립된 영국 국교회의 근본 교의는 신교적 성격이 강했지만 가톨릭적 요소도 섞여 있었다. 왕이 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그 아래에 주교, 사제 등이 위치하는 '주교 제도(主敎制度)'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엘리자베스는 종교계에 절대왕정의 지주를 세운 것이다.

 


간섭 - 메리 스튜어트와의 불화
앙리 2세와 프랑스에서 자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간섭하고 나섰다. 법률상 엘리자베스는 서자로서 상속권이 없는 데 비해 메리는 정식으로 튜더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메리에게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영국 의회는 즉시 엘리자베스를 공식적인 적자(嫡子)로 승인하여 더 이상의 혼란은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반감을 품게 된다. 메리 스튜어트도 그 후 계속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므로 두 사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평생 화해하지 않았다.

애매함의 승리 - 여성으로서, 왕으로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신성 로마 황제의 셋째 아들 카를 대공(大公), 스웨덴 황태자 에릭, 프랑스 왕 샤를 9세 등이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이들은 모두 가톨릭을 옹호하는 국가였기에 영국 국교회를 받드는 입장이면서 가톨릭 국가와 혼인하는 것은 자칫 국민들의 반발이나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특정 국가와 지나치게 친밀해지면 다른 국가의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항상 애매한 응답을 하여 사태를 수습하곤 했다.

예를 들면, A 국가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으면 B와 동맹을 맺는 척하고 A를 저지시켰다. 사태가 수습되면 B와의 동맹은 적당한 이유를 대서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기회주의자적 태도는 주변 국가 모두를 적으로 만들게 될 위험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그것을 훌륭하게 피해 갔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결단을 미루고 확답을 피했다. 엘리자베스와 영국을 번영하게 한 정치 수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몸에 결함이 있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외국으로부터의 혼담을 거절한 그녀는 '처녀 여왕'으로 불렸다.

"저는 영국과 결혼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말인데, '강한 영국'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절대적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녀에게는 개인적인 애정을 쏟을 상대,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 때문에 나라를 잃는 것은 이웃 나라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나 어울릴 얘기였다.

얼음의 미소 - 여왕 폐하의 의상 방
엘리자베스는 의상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한번 지은 옷은 안 입게 되더라도 소중히 보관했고 의상은 약 3천 벌이나 되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의 의상에 대한 일화를 살펴보자. 프랑스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하기 위해 스페인은 프랑스에 사신을 보냈다. 이에 프랑스 왕은 동맹국 영국의 동의를 얻기 위해 드 메스를 대사(大使)로 보냈는데, 상대방을 압도하는 엘리자베스의 태도에 대사는 당황했다. 대사가 당황한 것은 엘리자베스의 언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왕은 앞이 대담하게 패인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한 광경이 보이는 것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해 제대로 교섭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 당시에 여왕은 예순다섯 살이었다는데 드 메스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쓰라린 승리 - 가톨릭과의 대결
1568년, 메리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해 왔다.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이는 난처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메리는 튜더가 의 혈통이며 자신의 혈육인 데다가 가톨릭교도였기에 그녀를 처형하면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의 구실이 될지도 몰랐으므로 엘리자베스도 상당히 고민하였다.

영국 내에서는 가톨릭교도인 메리를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강했다. 엘리자베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20년 가까이 메리를 감금했다. 하지만 메리는 끊임없이 엘리자베스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결단을 내렸고,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두 사람의 불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가톨릭 교도 메리를 처형한 것은 주변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독실한 가톨릭 국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 사건을 기화로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두 나라는 전부터 험악한 사이였고 펠리페 2세로서도 단숨에 결말을 지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힘을 여러 나라에 다시 한번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맹공격과 폭풍우 때문에 선단(船團)은 큰 타격을 입고 '무적함대'는 사실상 괴멸되었다. 영국의 대승리로 스페인의 영광은 상당한 상처를 입었으나 엘리자베스는 이 승리를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해전의 결실이 의외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영국 경제는 여전히 파산 직전이었고 승리의 축배를 들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연애 - 엘리자베스의 사생활
엘리자베스에게도 몇 번의 로맨스는 있었다. 상대는 외국의 왕이 아닌 가신(家臣)들이었다.

그녀의 첫 연애 상대는 엘리자베스와 동갑내기인 귀족 로버트 다드 레였다. 위풍당당한 체구의 로버트를 그녀는 각별히 총애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방을 찾았다고 한다. 엘리자베스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출산하지도 결혼하지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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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인공은 웨식스 백작 로버트 데브르로서, 그는 엘리자베스와 헤어진 후에 재혼한 다드 레의 아내가 데려온 자식이었다. 여왕 앞에 나타난 이 청년은 스무 살이었고, 50대 중반에 접어든 여왕에게 그의 젊음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엘리자베스도 아들 같은 연인을 총애해 잇달아 요직에 앉히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기술은 어떤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무능했기 때문에 곧 여왕도 그를 외면했다.

자신이 여왕에게 버림받은 것은 여왕 주변의 간신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웨식스 백작은 반란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만다. 여왕에게 '연애'에 관한 교훈과 불신감을 준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결국 그는 1601년에 처형되었고, 그 명령을 내린 것은 당연히 엘리자베스 1세였다.

여왕의 죽음 - 영국의 어머니로서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는 숨을 거두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것은 바로 평생 갈등이 계속되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식을 낳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 국내에는 최적의 계승자가 없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에도 의사를 부르려 하지 않았으므로 신하들은 그녀를 타일렀다.

"폐하,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의사를 부르셔야만 합니다."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군주에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군주로서의 위엄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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