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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 사망 재단 토마스 제자 의대 의사

리베로수 2021. 6.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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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 사망 재단 토마스 제자 의대 의사

 

'유 퀴즈'에서 고(故) 이태석 신부의 제자가 출연했다.

16일 방송된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제자이자 한국에서 의사로 활동 중인 토마스 타반 아콧이 '자기님'으로 등장했다.

 

이태석 신부는 1987년에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돼 남수단의 마을 톤즈에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한 인물. 토마스는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를 만났고, 환자를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에 반해 의사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토마스는 먼 타지에서 의사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낯선 타국에서 의대를 진학하고 국가고시를 보기까지, 3~4년 동안 하루에 3시간씩만 자면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다만 토마스는 "한국어 공부를 틈틈이 하려고 드라마를 봤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이 보고 싶을 때, 공부하다가 갑자기 '나 왜 여기 와 있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토마스는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에 대해 "편찮으실 때도 아픈 사람 같지 않게 오히려 저희를 격려해주셨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아버지를 잃은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유재석은 고인을 추모하며 "참 안타깝다. 이런 분이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셨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태석 재단

http://www.smiletonj.org/main/


이태석


 李泰錫

요약한국의 가톨릭 사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으며 아프리카 수단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을 위해 헌신하였다.

 

톤즈 돈보스코 병원

 

출생-사망
1962.9.19 ~ 2010.1.14


본명
이태석


별칭
쫄리(John Lee)


국적
대한민국


활동분야
가톨릭(살레시오 수도회), 의학(톤즈 병원), 교육


출생지
부산


주요수상
인제 인성 대상(2005),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2009)


주요 저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2009)


주요 작품
묵상(默想)

 

1962년 9월 19일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1981년 부산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를 졸업하였다. 1990년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마친 후 1991년 살레지오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받았으며 1997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하였다. 2000년 4월 종신서원을 하였고 그해 6월 28일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Tonj)로 향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지로 불리는 수단의 남부 톤즈는 오랫동안 수단의 내전(內戰)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며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져 황폐화된 지역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이곳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지붕을 엮어 병원을 세웠다. 또한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순회하며 진료를 하였다.

 

그의 병원이 점차 알려지게 되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 병원 건물을 직접 지어 확장하였다. 하지만 오염된 톤즈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가 매번 창궐하자 톤즈의 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난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경지를 일구기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워 원주민 계몽에 나섰다.

 

처음 초등교육으로 시작한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차례로 개설하였고 톤즈에 부지를 마련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전쟁으로 상처 받은 원주민을 치료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치료의 목적으로 음악을 가르쳤으며 예상을 넘는 효과가 있자 학생들을 선발하여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구성하였다. 그의 밴드는 수단 남부에서 유명세를 탔으며 정부행사에도 초청되어 연주하였다. 2005년 그의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제7회 인제 인성 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2008년 10월 톤즈 현지에서 이태석 신부와 함께 헌신하던 의사 신경숙(현 구미 순천향대병원)에게 혈흔이 발견되어, 그해 11월 휴가차 입국하였을 때 순천향대병원에서 종합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그의 암은 이미 간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항생제를 투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항암치료에 잘 반응할 것이라며 완치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또 그렇게 기도했다. 서울 대림동 살레지오 수도원에 머물며 투병생활을 했으며 수도원은 자신이 머물기에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며칠간 양평에 머물면서 단식과 생식으로 건강을 회복하려 했지만 증세는 나빠졌으며 결국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4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투병생활 중 2009년 12월 17일 제2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을 수상했다. 그가 작곡한 묵상(默想)이 대표곡이며 저서로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은 일상의 에피소드를 집필한 에세이집《친구가 되어주실래요》(2009)를 남겼다.

 

이태석(李泰錫, 1962년 10월 17일(음력 9월 19일) ~ 2010년 1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살레시오회 소속 사제 겸 의사로 아프리카 수단 남부(현재는 남수단)의 와랍 주에 있는 마을인 톤즈에서 교육 활동과 의료 활동을 펼치다가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입국하였을 때, 대장암 4기를 진단받아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암투병 끝에 선종하였다. 선종 직전에 "Everything is good!"라는 말을 했다고 동료 수도자들이 증언한다.

 

별칭과 명성​

세례명은 요한, 별칭은 수단의 돈 보스코(수단의 슈바이처)로 칭송되었고, 톤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세례명에 성을 더해 발음하기 쉬운 ‘파더 졸리’(존 리 John Lee) 신부로 불렀다.

 

생애​

 

출생과 성장​

부산시의 남부민동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나 송도성당에서 알로이시오 슈왈츠 신부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 9살 되던 해(197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가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교회에서 하와이의 몰로카이 섬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과 산 벨기에 선교사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모로 카이(MOLOKAI)를 보고 다미안 신부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송도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학생회, 성가대, 복사(사제를 돕는 역할) 등 종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청년기​

1981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가톨릭 사제가 되는 뜻을 품었다. 복무를 마치고 특히 청소년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에 따라 1991년 8월 살레지오 수도회에 입회한다. 그리고 1992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1993년 1월 24일 수련을 시작해서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하고,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2년 철학 과정을 마친 후 서울 대림동 살레지오 수도원에서 역시 2년 과정의 사목실습을 하였으며, 1997년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로 유학한다.

 

그곳에서 재학 중, 한국에서 이미 20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 1991년 아프리카 수단으로 다시 파견된 공고미노 수사가 로마에 휴가차 들렀을 때 그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수단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것을 권유받는다. 1999년 방학 때 선교체험을 하러 아프리카 케냐에 들렀을 당시 남수단 톤즈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제임스라는 인도 출신 살레시오 수도회 신부를 만나 톤즈로 가게 되고, 이때 강렬한 인상을 받아 톤즈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사제 생애​

2000년 4월 27일 종신서원을 하고,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 구로3동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아프리카를 향해 선교사로 출발하여 12월 7일 아프리카 남부 수단 와랍 주 톤즈에 부임한다.

 

그곳에서 가난과 기아, 질병 등으로 도탄에 빠진 마을의 참상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겸한 의료봉사활동과 구호운동에 헌신한다.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 진료소를 만들어,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돌보며 인근 80여 개 마을의 순회진료와 예방접종도 했다. 학교를 만들고, 초·중·고교 12년 과정을 꾸려 수학과 음악도 가르쳤다. 기숙사도 짓고 톤즈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악기도 가르쳤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잠시 입국하였을 때, 대장암 4기를 진단받아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암투병 끝에 2010년 1월 14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새벽 5시 35분에 살레지오회 형제들과 가족들 그리고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향년 48세).

 

유해는 전라남도 담양군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이야기는 살레시오회 잡지 《살레지오 가족》과, 까리타스 수녀회의 《생활 성서》에 연재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라는 단행본으로도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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