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1세 조세핀 명언 전쟁 키 모자
나폴레옹 1세
프랑스의 군인 ·제1 통령·황제.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 제1제정을 건설했다. 제1 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 실패로 엘바섬에, 워털루 전투 패배로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
Napoléon I
출생-사망
1769.8.15 ~ 1821.5.5
본명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정치, 군사
출생지
지중해코르시카섬 아작시오
나폴레옹 키
나폴레옹은 ‘땅꼬마’라고 불릴 정도로 작은 키의 대명사처럼 회자된다. 단신(短身)임에도 부하들을 휘어잡아 세계를 호령하고 정복했다는 사실은 그를 더 드라마틱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일부에선 작은 키가 그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이른바 ‘나폴레옹 콤플렉스’설이다. 물론 나폴레옹을 틈만 나면 깎아내리려는 영국인의 ‘심보’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다? 아니다. 키가 작다는 것은 부검 이후 그의 키가 ‘5피트 2인치(157.5cm)’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온 말이다. ‘5피에 2인치’를 영국식 피트 단위로 부르면서 와전된 것이다. 프랑스의 옛날 길이 단위인 ‘피에(1피에=32.48cm)’는 영국의 ‘피트(1피트=30.48cm)’보다 2cm 정도 길었다. ‘피에’와 ‘피트’는 엄연히 길이가 달랐던 것이다. 피에의 길이도 프랑스,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나라마다 달랐다.
나폴레옹의 키는 영미식 피트로 환산하면 약 ‘5피트 6인치’로, 167.6cm이다.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4.1cm였으니 나폴레옹은 평균보다 3.5cm나 더 컸던 셈이다.
2009년 영국 일간지 〈타임스〉 인터넷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10가지 오해’라는 기사에서 나폴레옹의 실제 키는 18~19세기 평균 키였다고 소개했다. 한발 양보해서 나폴레옹의 키가 157cm가 조금 넘었다고 해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다. 《혁명의 시대》(에릭 홉스봄 저)에 나오는 나폴레옹 시대 징집병의 체격에 대한 통계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이 1797년 점령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와 그 주변 지역에 세운 리구리아 공화국에서 징집된 신병 가운데 72%가 150cm 이하였다.
나폴레옹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가 검은색 삼각모다. 만약 나폴레옹이 작은 키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다면 모자를 세로로 각을 세워 키가 커 보이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굳이 가로로 쓴 것을 보면 그의 키가 작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황실 근위병을 이끌고 다니며 전쟁을 했다. 황실 근위병은 프랑스 군대 정예 중의 정예다. 그들은 키가 평균 180cm가 넘었다. 나폴레옹이 그들 속에 있으면 작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나폴레옹의 체격은 빈약한 편이었다. 그 시대 군인들의 평균 체격보다는 작았던 것 같다. 나폴레옹의 전기를 쓴 크로닌의 견해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좋은 신체 조건이 요구되는 병과(兵科)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키는 작지만 실제보다 커 보이는 ‘다부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키는 작지도 크지도 않았지만 몸집은 별로였던 모양이다.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출생했다. 카를로 보나 파르테와 레티치아 라 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부모가 지어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란 본명을 이후에 프랑스 식으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 대왕·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코르시카 방언으로 프랑스어 회화에 고민하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재미로 지냈으나,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 소위로 지방 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 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프랑스 육군은 3회에 걸친 군대 이탈과 2중 군적에 대해 휴직을 명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 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의 무훈을 세웠다. F. 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지우(知遇)를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 군의 지휘를 맡았다.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 파(派)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 1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기민한 조치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 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 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 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칠음·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 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 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 통령으로서 국정 정비 ·법전 편찬에 임하고, 대(對)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 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 소식을 들은 L.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 넬슨의 영국 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 세계에 떨쳤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구술하는 회상록을, 동행하던 옛 부하 E. 라스카스가 기록하였다.
1810.4.2 조제핀과 이혼 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루이즈를 황후로 맞이하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은 이 말로 잘 설명된다. 그는 프랑스령의 외딴섬 코르시카 출신으로 가난과 설움 속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프랑스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30대 초반에 프랑스 황제로 등극해 유럽의 절반을 제패하고, 교육, 종교, 문화, 법률 등 오늘날 프랑스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지난 세기 프랑스 위인 열전에서 항상 1등의 자리를 고수한(그도 결국 20세기 드골에게 선두 자리를 내준다.) 위대한 인물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하나 나폴레옹
“위대한 군 지도자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테어 혼의 나폴레옹 평가이다. 오늘날까지 영웅의 아이콘인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매우 다면적인 사람이다. 정복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그리고 황제로서 각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책이 60만종이 넘는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프랑스와 유럽에 미친 영향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애리 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썼는데, <나폴레옹의 시대>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어떤 시기가 나폴레옹 시기인가를 놓고 고민을 할 정도이다. 그는 생몰연대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애리 스테어 혼은 나폴레옹의 시대를 1795년 젊은 장군이 정치권을 행사하던 시기부터 1820년 ‘위태로운 왕정 복권 시대’로 끝낸다고 일단 설명한다. 나폴레옹은 모든 위인들의 이름이 그러하듯, 시간을 초월해서 아직도 생생한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남아, 한 인간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찬양과 폄하를 오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어머니 레티치아 라몰니노 사이에서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승리하여 귀국하는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프랑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 코르시카의 가난한 한 소년이 프랑스혁명으로 왕이 물러난 자리에 다시 황제가 되어 왕정 복권을 이루어낸, 말 그대로 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가게 되었을까? 우선 군인으로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군들에게는 영웅이었다.
나폴레옹은 1785년 브리엔의 사관학교를 졸업하던 16살의 나이로 장교로 임관했다. 작은 키와 빈약한 몸매 때문에 수학자라는 별명을 얻는 이 소년 장교는 8년 후인 1793년인 툴롱에서 천재적인 전략으로 영국군들을 몰아냄으로써 무기력했던 프랑스 혁명군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25세의 나이로 소장으로 진급, 마음속에 찬란한 별을 품고 이탈리아 국경군의 포병 장군이 되었다. 1795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정치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폴 바라스는 당시 27살의 나폴레옹이 급성장할까 봐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앨리스테어 혼은 당시 나폴레옹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시 병사들은 월급도 받지 못하고 굶주린 데다 무기마저 빈약해서 거의 반란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스탕달은 <파르므의 수도원>에서 장교 세 명이 신발 한 켤레와 바지 한 벌, 셔츠 세 장을 공유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로디 다리에서 영웅적으로 군대를 이끌었을 당시 한 프랑스 장교가 ’전쟁터에서 구한 병사들의 모자로’ 구두창을 달았다고 전한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여겼던 이유(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속았다면서 이러한 생각을 버렸지만)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합지졸의 군대를 단 며칠 만에 최정예 부대로 변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1797년 10월까지 16만 명의 포로와 2천대 이상의 대포를 전리품으로 주머니에 넣고 귀국한다.
프랑스의 영웅, 우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폴레옹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어떤 인물이 될지 예측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기라도 하듯이 이 땅덩이가 벌써 발 밑에서 달아나는 것 같았다.”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참배하는 마크롱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부인 브리지트 여사와 함께 5일(현지시간)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 묘역에서 그의 사망 200주년을 기리고 있다.
나폴레옹 1세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영국이 귀양 보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1821년 5월 5일 사망했다. 2021.05.06.
프랑스 영웅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 다시 보는 그의 리더십
나폴레옹 사후 그와 관련해 약 8만5000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 수많은 책은 복귀한 영웅적 일대기, 승리를 휩쓴 전쟁의 지휘관, 공화정을 제정으로 복귀한 나폴레옹의 야망, 나폴레옹과 여성들 등을 다루기도 했지만, 발간된 책의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 특히 나폴레옹 리더십은 지금 시대에도 상당량의 책이 출간될 정도로 리더십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보고’인 셈이다.
프랑스인이 가장 존경하는 영웅
2019년 프랑스에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3000여 명에게 물었다. 프랑스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프랑스 재건에 앞장선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을 3위로 뽑았고, 프랑스 제국의 영광 시대를 구가한 태양왕 루이 14세를 2위로 꼽았다. 그렇다면 1위는 누구였을까.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응답자의 20%가 그를 선택했다. 2021년 5월 5일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을 맞아 지금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에 관한 각종 전시회와 기념사업이 열리고 있다.
파리 외곽의 라 빌레트 컨벤션센터에서는 4월14일부터 5개월간 나폴레옹의 각종 유품 150여 점을 전시하고, 나폴레옹의 시신이 안치된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국립 기록원 등에서도 나폴레옹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 여론도 있다.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법률적 토대를 정립하고 교육, 금융 등 행정의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현대 프랑스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 및 문화적 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된 노예제를 부활시켰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조항을 법전에 넣었으며,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 즉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무시하고 황제에 취임해 시대정신을 퇴보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그 어떠한 명분이든 전쟁을 통해 300만에서 6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은 나폴레옹의 과오라고 지적한다.
여성계를 비롯해 사회 일각에서는 나폴레옹을 두고 ‘여성 혐오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폴레옹 법전』에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며, 거주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야 할 의무가 있다’와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등, 여성의 법적 권리를 남편에게 부여한 것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라는 그릇된 시각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나폴레옹 법전』이 민법, 상법, 형법, 민사 소송법, 형사 소송법 등의 체계를 마련해 ‘로마법’과 함께 유럽을 비롯한 현대의 법 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점은 인정하지만, 여성 평등과 노예 제도 등의 조항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나폴레옹 사후 프랑스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나폴레옹에 관해 약 8만5000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한 인물에 대해 이토록 많은 책이 출간된 것은 드문 예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다양한 분야에서 들여다봐야 할 연구, 혹은 동경과 흠모의 대상이라는 반증이다. 이 수많은 책은 영웅적 일대기, 승리를 휩쓴 전쟁의 지휘관, 공화정을 제정으로 복귀한 나폴레옹의 야망, 조세핀으로 대표되는 나폴레옹과 여성들 등을 다루기도 했지만, 발간된 책의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
특히 나폴레옹 리더십은 지금 시대에도 상당량의 책이 출간될 정도로 리더십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보고’인 셈이다.
나폴레옹 리더십을 바라볼 때 먼저 언급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콤플렉스의 극복’이다. 사실 나폴레옹은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그는 키가 151㎝에 불과했다고 한다. 해서 나폴레옹은 항상 말을 타는 것을 선호했고 일명 부풀려진 ‘나폴레옹 모자’를 즐겨 썼다. 심지어 말 위에서 식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어려서부터 잔병이 많았고 커서도 구토증과 만성 위염에 시달렸으며, 후일 황제로 전쟁을 지휘할 때도 요로 결석과 치루염은 물론이고 만성 불면증을 앓았다고 한다. 이런 신체적인 약점은 내색하지 않거나 과장된 행동으로 극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을 괴롭혔던 콤플렉스는 출생과 신분이었다.
그는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평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본래 이탈리아 영토였으나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나폴레옹의 몸에는 또한 이탈리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파리의 사관학교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육군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나폴레옹은 작은 키, 볼품없는 외모, 평민 출신 등으로 멸시와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의연했다.
누군가 그의 작은 키를 조롱하자 나폴레옹은 “비록 땅에서 재는 키는 작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는 키는 당신보다 훨씬 크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신체적, 신분적 약점을 딛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이자 19세기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행동, 명령, 생각에도 책임감을 가지다
나폴레옹은 16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그 기간 동안 프랑스는 유럽에 혁명의 가치를 수출했다. 그 혁명의 기운은 당시 유럽의 왕정 국가에게는 위협적인 체제 전복으로, 또 다른 유럽 국가에게는 프랑스 패권주의의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나폴레옹은 독특하게도 국민 투표 형식을 통해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 국민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감은 전쟁에서의 승리, 영토의 확장이 아니었다. 바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체제를 위한 새로운 리더십이었다. 그것에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부합했다.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무엇일까.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초토화한 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쳤던 위대한 장군, 프랑스 변방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소위에서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된 입지전적 인물, 스페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온 실패한 혁명가, 황후 조세핀과의 불 같은 사랑, 그의 황제 즉위에 실망한 베토벤이 교향곡 이름을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으로 바꾸었다는 것 등등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세계사와 프랑스 역사에 남긴 족적은 크고 뚜렷하다. 그는 18세기 프랑스를 뒤흔든 혁명의 거센 바람을 정면에서 맞으면서 프랑스의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다. 비록 그의 일생이 전쟁과 투쟁 그리고 혁명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행했던 정치적 행위와 법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현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위대함을 거론할 때 군인으로서, 황제로서의 수많은 승전과 영웅적 발자취를 들지만 정작 학자들이 나폴레옹에 관한 평가에서 높이 사는 것은 법률 정비와 프랑스 국민을 하나로 결집한 리더십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원칙을 기본으로 『나폴레옹 법전』을 완성했다.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에서 “나의 진정한 영광은 40여 번의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나폴레옹 법전』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이 법전에 공을 들였다. 학자들은 이 법전을 두고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양심의 자유, 국가의 탈종교화 등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발상이다. 나폴레옹은 법치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구축한 나폴레옹이 민주적인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는 개인적 욕망으로서의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 프랑스의 유럽 지배와 조국의 영광을 좇았지만, 단 한 번도 국민의 반대편에 선 적이 없는 인물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유럽 지배, 신화적인 전투 승리의 밑받침에는 프랑스 군대의 영웅적인 희생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당시 국민군의 주축 병사들은 나폴레옹에게 진심으로 충성했고 나폴레옹과 전투에 참여해 전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나폴레옹이 전 국민 중 단 1%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왕정을 타파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이라고 믿고 또한 지지했다. 이 일치된 힘으로 나폴레옹은 ‘국민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인들은 평민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들과 같은 막사에서 잠을 잤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대신 나폴레옹은 군인들에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하고 희망을 선사했다. 즉, 계급과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부하를 대한 것이다. 이것은 ‘능동적인 충성’ 발현의 가장 큰 힘이다. 그 상징이 나폴레옹이 제정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다. 이 훈장은 국민군의 자부심이다. 혁명을 이뤄 낸 프랑스 국민과 국민군은 자유와 평등사상으로 무장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대였다. 이들의 마음을 지배한 자유와 평등사상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광을 결합해 냈다. 그리고 노력하고 조국의 영광을 위한다면 그 명예를 조국이 알아주고 보상한다는 것을 이 훈장으로 증명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 표본으로 자신을 들었다. 프랑스 변방의 섬 출신 하사관이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했다. 이 부분이 나폴레옹 승전 신화의 비밀이다. 나폴레옹은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바로 나폴레옹 리더십의 핵심이다.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99.8%의 지지율. 만장일치의 국민 선택에 의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에게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리더십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치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위기 상황에서도 국민과 군대를 이끄는 데 있어서 현명하고 침착했다. 또한 자신의 행동과 명령 그리고 생각하는 것에조차 책임감을 부여했다. 이 같은 나폴레옹의 정직, 책임정신이 두드러진 리더십이 있었기에 그는 황제나 혁명가 등의 수식어보다 지금 ‘영웅’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부하들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는 리더가 되기는 쉽지 않다. 나폴레옹 역시 국민과 군대의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리더가 되었지만 그 리더십의 지속에서 실패했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몰락에서 그 단초를 찾는다. 그것은 독선과 아집이다. 나폴레옹은 리더가 흔히 범하는 실수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국민과 군대와 직접 소통하는 통치를 즐겨 했다. 하지만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그의 리더십이 독선과 아집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나폴레옹에게는 개인적인 실패를 가져옴과 동시에 18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혁명의 불길을 꺼지게 했다. 나폴레옹 패망 이후 유럽과 프랑스는 반동의 시대로 돌아갔다. 왕정이 복귀되고 봉건 통치가 되살아난 것이다.
역사는 나폴레옹을 실패자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였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선구자다. 16년간 나폴레옹과 함께한 국민들은 새로운 전형의 리더를 접했고 이후 프랑스 역사에서 자유와 평등, 조국의 영광을 기치로 내건 리더들이 탄생한 것이다.
나폴레옹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 민심과 함께 하는 소통의 리더십이다. 독일의 지성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진군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말을 타고 진군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준비와 소통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는 8남매의 둘째. 집안은 이탈리아의 소지주 출신이었다. 코르시카는 이탈리아의 영토였지만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해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탄압으로 코르시카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성도 프랑스식의 보나파르트로 개명했다.
1779년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785년 나폴레옹은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프랑스는 격동기였다. 루이 14세의 통치기 이후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다. 루이 15세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전 이후 국가 부도 일보직전이었다. 국민들의 삶은 바닥이었다. 이후 국민의회를 결성했지만 민주적 목소리는 탄압받았다. 억눌림은 반동의 힘을 키우는 양식이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에 불길이 올랐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철옹성 같던 왕정은 무너졌다. 프랑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열은 있었다. 부르주아를 주축으로 한 지롱드당, 시민 계급이 주축이 된 자코뱅당으로 양분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당이 권력을 잡았다.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 자코뱅당을 지지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가족과 함께 마르세유로 이주한다. 마르세유는 행운의 도시였다. 마르세유 최고 부자 클라리 가문과 친분을 쌓은 후 형 조제프는 클라리 가문의 마리 줄리와 결혼하고 나폴레옹 역시 데지레 클라리와 약혼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웠다. 무려 1만5000여 명이 처형되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1793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네덜란드는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한다. 프랑스에서도 반 로베스피에르 파의 반격으로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었다. 나폴레옹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탕과 친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당시 실력자 파울 바라스의 후원으로 그는 석방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사라지자 외국에 망명해 있던 왕당파들이 반프랑스 동맹국의 지원하에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진군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선두에 섰다. 그는 포격전으로 왕당파를 격파했다. 이 공으로 나폴레옹은 사단장으로 승진, 프랑스 정계에 이름을 올린다.
1796년 나폴레옹은 데지레와 파혼한다. 그리고 미망인 조세핀과 결혼한다. 당시 프랑스는 아직도 혼란기였다. 국내는 혁명파와 왕당파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연합군은 프랑스의 위협이었다.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하고 이탈리아 북부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이 승전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존재감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나폴레옹의 존재감이 커지자 정부 실력자들은 나폴레옹 견제를 시작했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나폴레옹을 파리에서 쫓아내려는 속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르항에 상륙했다. 그 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때부터 정치적 야망을 키웠다. 그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데다 외세에 대응치 못하는 총재 정부에 실망했다.
1799년,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제를 수립했다. 3명의 통령 중 나폴레옹은 제1통령이 되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 30세였다. 유럽은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결단을 내렸다. 이탈리아 원정을 결심한 그는 한니발 이후 처음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무너뜨렸다.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하자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긴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내치에서도 성과를 남겼다. 은행을 설립해 금융 제도를 정비하고 교육의 국가 부담을 늘려 혜택이 골고루 퍼지게 했다. 또한 당시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 봉건적인 제도 등을 묶어 『나폴레옹 법전』을 펴냈다. 이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근대적 가치의 성문화인 것이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에 취임했다.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1804년,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황제를 뽑는 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률 99.8%로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1804년 12월 2일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황제로, 제정 복귀로 퇴색한 시대 정신
나폴레옹은 유럽에 하나의 가치를 전파하려 했다. 걸림돌은 영국이었다. 나폴레옹은 도버 해협 인근에 대군을 집결시켰다. 영국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과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으로 대항했다.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나폴레옹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참패를 당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재편했다. 형 조제프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임명했고, 스페인 국왕 역시 형제를 보냈다. 그리고 라인 동맹을 결성 1000년을 지속해 온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했다. 유럽은 새로운 정신, 새로운 통치 시대를 맞은 것이다.
나폴레옹 가문이 유럽 왕가를 지배하게 되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새로운 시대정신에서 반동적이며 봉건적인 황제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나폴레옹에게 출신 성분은 약점이었다.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려고 혁명을 일으켰지만 출신 성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폴레옹에게는 국민의 지지와 국민군의 절대 충성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혈통의 빈약 감을 채울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형제, 누이를 왕과 왕후로 만들고 자신도 유럽 왕가의 명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당시 영국은 해상 세력을 바탕으로 많은 식민지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소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오히려 대륙 봉쇄령으로 유럽 국가들이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가 반기를 들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하지만 러시아는 죽음의 땅이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큰 고통을 당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러시아는 굴복하지 않았다.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60만 대군은 불과 1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자 제6차 대 프랑스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동맹군과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했다.
영웅 신화가 무너졌다. 프랑스로 돌아가 군세를 회복하려는 나폴레옹에게 무려 50만 명의 군대가 공격해왔다. 당시 나폴레옹에게는 7만 명의 병력만 있었다. 1814년 대프랑스 동맹군은 파리 외곽까지 진출했다. 나폴레옹의 참모들이 배신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대세를 인정하고 황제에서 물러나겠다는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동맹군은 부르봉 왕가를 부활했다. 루이 18세가 즉위한 것이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했다. 파리에 입성한 그는 군대를 모으고 재기를 노렸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참패를 당했다. 딱 100일 천하였다. 그는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 헬레나에 유폐되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조롱받았다. 그러다 1821년 5월 5일 위암으로 사망했다.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의 시신은 20년 뒤인 1840년 파리로 운구되었고 1860년 지금의 장소인 앵발리드에 안치되었다. 나폴레옹 사후 유럽은 ‘통치를 비롯한 유럽의 모든 시스템’을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렸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혁명의 전파자였다. 하지만 한 번 태동하기 시작한 자유, 평등의 정신은 시들지 않았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사후 20여 년 뒤 대혁명으로 민주적 공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알프스를 넘게 만든 건 부하들의 신뢰
유럽에는 속담이 있다. 100마리 사자와 100마리 양의 싸움이다. 이 싸움의 결과는 뻔한다. 하지만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100마리의 양과, 양 한 마리가 준비하는 사자 100마리의 싸움은 그 결과가 다르다. 바로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양 100마리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100마리 무리를 이긴다는 것이다. 이는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만큼 리더의 역할은 우선해야 할 체크 포인트다. 나폴레옹은 국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의 실행과 결과에 대한 책임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비전은 ‘능력만큼 대접받을 수 있고 노력의 결과를 보상받는 사회’였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전파했다. 나폴레옹은 ‘리더는 지성과 인격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성은 풍부하나 인격이 부족한 사람은 최악의 리더다. 지성이 모자라도 인격이 풍부한 편이 낫다’고 리더의 조건을 설명했다.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는 리더의 명령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런 리더는 단순한 명령 자다. 반면 인격을 기반으로 한 리더의 지시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팀워크를 최우선으로 한다.
나폴레옹은 말한다. “모든 결정에 앞서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하지만 결정할 때가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라고. 나폴레옹은 지시에 앞서 준비한 리더다. 그는 “나의 결정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오랜 시간 생각하고 일어날 일을 예측해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끊임없이 ‘만약에?’라는 질문을 되풀이한다”라고 리더의 준비된 학습을 이야기했다.
나폴레옹 명언
또 하나 나폴레옹 리더십의 중요한 점은 강한 정신력이다. 그는 리더는 조직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조직원은 리더를 존경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 비결은 바로 리더의 솔선수범이다. 전투에서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조직원의 눈에 들어온다. 그 죽음의 현장에서 리더는 권위, 명예, 승리가 아닌 조직과 조직원의 승리와 생존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작전인 알프스 원정에 성공한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의 참모, 병사들도 이것이 무모한 작전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한마디에 알프스를 올랐다. 이는 리더와 조직원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대감의 일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두 개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영국의 산업 혁명이고 또 하나는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이 두 혁명은 유럽을 비롯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혁명과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나폴레옹은 원대한 시대정신을 설파했다. 물론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발자취는 크다. 지금의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 역사에서 승전의 나팔을 드높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이 추구한 시대의 가치에 있다.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 박애의 혁명 정신에 영광과 명예의 가치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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