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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의빈 성씨 독살설?

리베로수 2021. 12. 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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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 宜嬪 成氏


빈호
의빈(宜嬪)


출생
1753년(영조 29년) 7월 8일
장소 불명


사망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 미시
(향년 34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사당


의빈 궁(宜嬪宮)
묘소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후궁 묘역
의빈 창녕성씨 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했다. 

 

의빈 성씨는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고 혜경궁 홍 씨가 곁에 두고 길렀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곽장 양문 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 빈 묘지명》에 따르면 재능·기술·예술까지 완전히 갖춘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차례 거절하면서 하인이 벌을 받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한미한 집안은 외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빠 성완(成浣)[11]은 정조에 의해 어영청 군가요에서 파면되었으나 성협(成浹)과 동궁의 내례(內隷, 하인)가 되었다. 

훗날 성완은 부사용, 성협은 절충장군이 되었다. 고모는 정방(鄭枋),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친인척은 요직에 올랐다. 이에 비해 아버지 성윤 우와 어머니 부안 임 씨의 추증은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지 2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옹주는 경기(驚氣),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조졸했다. 뒤이어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도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의빈 성씨의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 왼쪽 언덕에 마련되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말년에 제사 궁(祭祀宮)을 의빈 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七宮)에 제향 되었다. 순종(純宗) 재위 기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고 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이후 일제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했다. 의빈 성씨는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고 혜경궁 홍 씨가 곁에 두고 길렀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곽장 양문 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 빈 묘지명》에 따르면 재능·기술·예술까지 완전히 갖춘 여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차례 거절하면서 하인이 벌을 받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한미한 집안은 외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빠 성완(成浣)은 정조에 의해 어영청 군가요에서 파면되었으나 성협(成浹)과 동궁의 내례(內隷, 하인)가 되었다. 

 

 

 

훗날 성완은 부사용, 성협은 절충장군이 되었다. 고모는 정방(鄭枋),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친인척은 요직에 올랐다. 이에 비해 아버지 성윤 우와 어머니 부안 임 씨의 추증은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지 2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옹주는 경기(驚氣),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조졸했다. 뒤이어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도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의빈 성씨의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 왼쪽 언덕에 마련되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말년에 제사 궁(祭祀宮)을 의빈 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七宮)에 제향 되었다. 순종(純宗) 재위 기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고 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이후 일제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의빈 성씨의 입궁 계기는 부친 성윤우가 전포 아문의 관리와 함께 7,000냥을 범포(犯逋, 나라에 바칠 돈이나 곡식을 써 버림)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 만큼 망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나오지 않는다.

의빈은 홍봉한의 풍산 홍 씨 가문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762년(영조 38) 이후에 혜경궁 홍 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

 

의빈이 입궁하기 전에 친어머니(증 정경부인 부안 임 씨)는 1756년(영조 31)에 사망했고, 성윤우는 평소 담벼락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와병 중이었으며,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효정왕후(헌종의 왕비)와 철인왕후(철종의 왕비)는 자식이 없어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던 경우가 있었는데, 혜경궁에게는 정조, 청연 공주, 청선공주가 있었다. 하지만 임오화변(1762년) 이후 정조는 1776년(영조 52, 정조 원년)까지 혜경궁이 머문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에 있었고 청연공주는 1765년(영조 41), 청선공주는 1766년(영조 42)에 하가해서 혜경궁을 자주 만나러 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의빈은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늘 혜경궁 곁에 있을 수 있고 정조, 청연공주, 청선 공주와 비슷한 나이대여서 혜경궁이 의빈을 자식처럼 기른 것으로 추측된다.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점과 혜경궁이 수양딸로 키운 걸 보아 지밀, 침방, 수방과 같은 고위 부서의 생각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이전에는 법적으로 천민만 궁녀가 될 수 있었지만 중인 출신이 지밀, 침방, 수방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는데, 영조 재위 시절에 웃전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으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될 수도 있으니 당시에는 사건 자체를 덮은 것으로 추측된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 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 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 [30] 상의(尙儀)가 되었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 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설)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수락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승은 궁녀/후궁들을 보면
귀인 조 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 상궁 이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상궁 김 씨(현종의 후궁)- '홍수의 변'에 연루되어 유배
희빈 장 씨(숙종의 후궁) - 사사
정빈 이 씨(영조의 후궁) - 독살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 직접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33]
폐숙의 문 씨(영조의 후궁) - 폐출 및 사사
숙빈 임 씨(사도세자의 후궁) - 첫 임신 때 낙태 미수 및 사도세자 사후 작호도 깎이고 어렵게 생활[34]
경빈 박 씨(사도세자의 후궁) -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음

숙종의 후궁인 명빈 박 씨, 귀인 김 씨, 소의 유 씨와 영조의 후궁 귀인 조 씨처럼 조용하고 평탄하게 산 승은 후궁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후궁 생활을 하는 순간 앞의 예시들처럼 기본적으로 신변에 대한 위협이 따르게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피하고 싶을 만한 일이다.

사족으로 첫 번째 승은 거부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사도세자는 젊은 시절부터 궁녀들을 취해 후궁으로 삼아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영조는 그렇게 태어난 서 손자들(은언군, 은신 군, 은전 군, 청근 옹주 등)마저 싫어할 정도로 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정조 역시 아버지의 절차를 따라 어릴 때부터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면, 영조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빈이 거절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물론 영조 때문이라는 것은 2번째(영조가 사망하고 정조 즉위 후) 승은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

그러나 "문효를 잃은 뒤로 늘 죽기를 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자식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설)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 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설)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수락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승은 궁녀/후궁들을 보면
귀인 조 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 상궁 이씨(인조의 후궁) - 사사
승은상궁 김 씨(현종의 후궁)[32] - '홍수의 변'에 연루되어 유배
희빈 장 씨(숙종의 후궁) - 사사
정빈 이 씨(영조의 후궁) - 독살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 직접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
폐숙의 문 씨(영조의 후궁) - 폐출 및 사사
숙빈 임 씨(사도세자의 후궁) - 첫 임신 때 낙태 미수 및 사도세자 사후 작호도 깎이고 어렵게 생활[34]
경빈 박 씨(사도세자의 후궁) -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음

숙종의 후궁인 명빈 박 씨, 귀인 김 씨, 소의 유 씨와 영조의 후궁 귀인 조 씨처럼 조용하고 평탄하게 산 승은 후궁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후궁 생활을 하는 순간 앞의 예시들처럼 기본적으로 신변에 대한 위협이 따르게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피하고 싶을 만한 일이다.

사족으로 첫 번째 승은 거부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사도세자는 젊은 시절부터 궁녀들을 취해 후궁으로 삼아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영조는 그렇게 태어난 서 손자들(은언군, 은신 군, 은전 군, 청근 옹주 등)마저 싫어할 정도로 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정조 역시 아버지의 절차를 따라 어릴 때부터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면, 영조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빈이 거절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물론 영조 때문이라는 것은 2번째(영조가 사망하고 정조 즉위 후) 승은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없다.

 

그러나 "문효를 잃은 뒤로 늘 죽기를 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자식에 대한 애정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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