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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 음모론

리베로수 2022. 9. 1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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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 영국의 왕세자비 [ Lady Diana Frances Spencer ] 음모론

출생 - 사망 1961.07.01. ~ 1997.08.31. 1996.8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고 영국 왕실을 떠나다 1981년 7월 영국의 세인트 폴 성당 앞, 한여름의 무더위도 잊은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곧 시작될 20세기의 동화를 기다렸다. 동화의 히로인은 자락이 7m나 되는 아이보리색 실크 웨딩드레스를 입고 마차에서 수줍게 내려섰다. 그녀는 젊고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군중들은 현실에 나타난 동화 속 주인공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아버지 스펜서 백작의 팔짱을 낀 레이디 다이애나는 이제 남편이 될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1위 찰스 왕세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성당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결혼식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 7억의 사람들도 모두 찰스 왕세자 부부가 동화의 마지막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삶은 동화가 아니다.

이 결혼식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두 사람의 가장 비극적이고 불행한 결혼의 시작이었다. 1981년 7월에 시작된 이 영국 왕세자 부부의 우여곡절 많은 결혼 생활은 15년 후 1996년 8월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년 후 1997년 8월 다이애나 비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 당시 갓 스무 살이었던 다이애나 비와 그녀보다 12살 많은 찰스 왕세자는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이애나는 귀족 신분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유치원 보모로 독립적 삶을 시작하려던 순진한 아가씨였고 찰스는 태어날 때부터 제1 왕위 계승자로 떠받들어지며 공부에도 소질을 보여 케임브리지를 나온 그야말로 노련한 지식인 왕자님이었다.

다이애나는 자기 발로 뛰는 스포츠와 춤을 좋아했지만 찰스는 말을 타는 폴로와 사냥을 즐겼다. 다이애나는 함께 하는 대화와 유대감을 중시했지만, 찰스는 혼자 하는 사색과 독서를 더 좋아했다. 다이애나는 결혼 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지만, 찰스는 가는 곳마다 스캔들을 뿌려대는 난봉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다이애나와 결혼 당시 그는 오랜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 볼스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훗날 다이애나 비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세 사람이 함께 한 결혼이니 좀 붐볐죠’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결혼은 연애기간부터 삐걱거렸다. 순진하고 미숙했던 레이디 다이애나는 자신이 왕세자비가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 찰스 왕세자의 주변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찰스 왕세자에게 결혼은 왕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는 한 남자로서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지낼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공석인 왕세자비의 자리를 메워줄 적당한 여인을 찾고 있었다. 왕세자비로써 그리고 훗날 왕비로서 부족하지 않을 귀족 신분과 미모, 2세를 낳아줄 건강, 그리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순종적 태도를 가진 처녀라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애초에 사랑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나누어줄 사랑도 충분치 않았던 찰스 왕세자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20살의 다이애나를 편의상 왕세자비로 골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 왕세자의 오산이었다. 생각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줄 알았던 다이애나 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아는 강했고, 의지는 굳세었으며, 왕실 누구보다도 현명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불행이 싹텄다. 다이애나 비는 마치도 20세기 이전의 왕들처럼 버젓이 애인을 따로 두겠다고 나온 찰스 왕세자의 뻔뻔함을 참을 수 없었고 자신을 왕세자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왕실의 태도에 깊이 상처를 입고 반기를 들었다. 그녀는 동화 속 왕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고분고분한 공주가 아니라 20세기 후반을 살아내고 있는 자립심 강하고 자존심이 센 여성이었다.

스펜서 백작의 수줍은 셋째 딸 다이애나 비는 1961년 7월 1일 훗날 스펜서 백작 7세가 되는 올소프 자작 에드워드 존 스펜서와 펌이 남작 4세의 딸 프랜시스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두 딸아이를 둔 스펜서 부부는 그녀가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아닌 것에 상당히 상심했다. 부모의 상심은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전달되어 다이애나는 어렸을 때 자신이 남자아이로 태어나지 않은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올소프 자작 부부의 근심은 4년 후 다이애나의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해소되었지만, 아이 때 느낀 자존감의 혼란은 다이애나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7살 때 일어난 부모의 이혼사건도 그녀의 소녀시절을 불운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양육권과 재산권을 둘러싼 지루한 법정싸움에 다이애나의 남매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어머니가 떠난 집에 남은 어린 다이애나와 남동생은 부모의 따사로운 손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인형과 작은 생물을 돌보는 일에 집착했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행복을 느꼈다. 학업에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못되었다. 언니 사라와 남동생은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수재였지만 다이애나는 평균 이하 정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고 이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열등감이 되었다.

그녀는 발레를 좋아하고 요리와 청소, 아기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런 재능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주변의 사람들도 다이애나를 특기가 없는 그저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이 모든 일을 예민하게 느끼고 상처 입었지만, 겉으로 자신의 불행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귀족 가문의 영양인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10대 다운 반항이 아니라 속으로 삭이며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뒷자리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의 아가씨로 성장했다.

그녀의 이런 성격은 왕세자비가 된 후 갑자기 세상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자 문제를 일으켰다. 엄격한 왕실에 적응하는 것도, 대중 앞에 나서 왕세자비의 일을 수행하는 것도 모두 스트레스가 되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침범했던 것이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본 것은 그가 언니 사라의 남자 친구였던 17살 때였다.

누구나 선망하는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 다이애나가 느낀 감상은 그가 가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언니 사라와 8개월간 좋은 만남을 이어가던 찰스 왕세자는 사라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다이애나의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이애나는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받아 런던에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막 직업을 구했고,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수다를 떨고 파티를 열고 클럽에 가는 생활이 한창 즐거운 스무 살이었다. 그녀는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이 뒤로 젖혀질 만큼 웃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귀족의 딸이라는 허울을 벗어 던지고, 독립한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기 시작한 다이애나 앞에 찰스 왕세자가 다시 나타났다. 사랑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그들의 만남은 극적이지 않았다. 존경하던 친척을 잃은 찰스 왕세자를 위로하는 모임에 초대받은 다이애나는 우연히 찰스 왕세자의 옆자리에 앉게 되고 그녀 다운 따뜻함으로 왕세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상심의 시기에 다이애나의 위로를 들은 찰스 왕세자는 그녀에게 갑작스레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살 미숙한 사춘기 소녀가 아니라 스무 살의 처녀로 성장한 다이애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여러 면에서 찰스 왕세자가 찾던 여인이었다. 영국 왕세자의 비가 되기 위해서는 성공회 신자이고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이며 왕족이거나 귀족 가문 출신이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다이애나는 이 조건에 합당했다.

거기다 그녀는 아름답고 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 따뜻함도 가진 여자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찰스 왕세자의 데이트 신청과 왕세자와의 데이트가 거듭될수록 증폭되는 언론과 세간의 관심 속에서 다이애나는 중심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어디로 떠밀려 가고 있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찰스 왕세자의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만남부터 결혼까지 모든 것이 주변에 의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혼 며칠 전 다이애나는 문득 자신이 찰스 왕세자의 진짜 마음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묻자 찰스 왕세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사랑하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이 말은 결혼식 중 주교의 질문에도 다시 한번 반복되었다 ‘사랑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매우 기묘한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을 붙인 찰스 왕세자의 진심은 신혼이 시작되자마자 곧 밝혀졌다.

남편의 여자, 카밀라 파커 볼스 다이애나 비에 대한 찰스 왕세자의 사랑은 자연인 여성에 대해 자연인 남성이 품은 자연스럽고 애틋한 사랑이 아니라 왕세자가 왕세자비에게 가지는 공식적인 사랑이었다. 찰스 왕세자가 한 명의 남자로서 가진 사랑은 연애 시기에도 결혼 후에도 다이애나 비에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가 아니라 인간 찰스로서 그가 사랑한 여인은 첫사랑이었지만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카밀라 파커 볼스였다. 처녀시절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 증조할머니가 당신의 고조부인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답니다. 우리도 그럴까요?’라는 매우 도발적인 말을 건넸다고 한다.

20대 초반에 만난 찰스왕세자와 카밀라는 서로 사랑을 느꼈지만 너무 젊은 나이와 카밀라가 귀족 신분이 아니라는 장애가 찰스 왕세자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와의 사랑을 남겨둔 채 군에 입대해 몇 년간 영국을 떠났다. 왕세자의 청혼을 기다리던 평민 처녀는 신분을 한탄하며 찰스 왕세자의 친구인 앤드류 파커 볼스 대령과 결혼했다.

그러나 찰스왕세자와 카밀라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카밀라와 앤드류 파커 볼스와의 결혼 소식을 들은 찰스 왕세자는 무척이나 후회하고 상심했다고 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우정을 가장하며 파커 볼스 부부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정은 이미 허울일 뿐 두 사람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남편 앤드류 파커볼스는 찰스의 왕세자라는 신분에 주눅 들어 이 부정한 두 남녀의 관계를 방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1 왕위계승권자로서 결혼 압박에 시달리던 찰스 왕세자는 사랑하는 여인 카밀라를 두고 신붓감을 찾아야만 하는 고뇌에 빠졌다. 그래서 이런저런 염문을 퍼뜨리며 난봉꾼을 자처했다.

카밀라가 평민 처녀라는 이유로 결혼을 망설였던 찰스 왕세자에게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면서 왕위를 버려버린 큰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찰스 왕세자는 왕이 되고 싶었고 왕이 되기 위해선 적당한 왕세자 비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두 손에 든 떡을 다 가지고 싶은 천상 왕족인 찰스 왕세자는 적당히 속여먹기 좋은 어리고 순진한 여자가 필요했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눈 안에 들어왔다. 카밀라는 자신들의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만만한 상대로 다이애나가 적당하다고 찰스 왕세자에게 그녀를 권했다. 다이애나와의 약혼 시기에도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에게 사랑을 담은 커플 팔찌를 선물했으며 신혼여행 중에는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흥분과 혼란 속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침착을 되찾은 다이애나 비의 눈에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의 불륜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청산해줄 것을 읍소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는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한다고 밀어붙이며 아무런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의 자살시도와 폭식증, 거식증을 오가며 다이애나 비가 질투와 자기혐오에 빠져 피폐해져 가도 찰스 왕세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훗날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다큐멘터리에서 다이애나 비와의 관계가 거의 파탄난 다음에 다시 카밀라와 혼외정사를 했다고 고백했지만, 다이애나 비는 찰스 왕세자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결혼생활 중에도 단 한 번도 카밀라와의 관계를 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가식적 왕실 생활 그리고 파경

다이애나 비는 해리 왕자가 태어난 후부터 이미 찰스 왕세자로부터 마음이 떠났다고 훗날 고백했다.

카밀라 파커 볼스로 인해 결혼 직후부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는 불화했지만, 그들은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들의 갈등을 감추어야만 했다. 다이애나 비는 시어머니인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찾아가 찰스 왕세자의 부정을 폭로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 란 대답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왕실은 그 구제불능 왕세자가 국민들 앞에서 더 멋지고 신뢰감 있게 보이도록 끊임없이 언론 플레이를 했고 그 옆에 서서 다이애나 비는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연기해야 했다. 원래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이던 다이애나 비는 폭발적인 언론과 세간의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왕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언론에 노출되면서 성장한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비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카밀라에 대한 질투와 남편에 대한 불신, 거기에 더해 대중 앞에서의 가식적인 연기까지 모든 것이 다이애나 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손목을 그었고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으며,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면서 여위어갔다.

그런 중에도 그녀는 윌리엄과 해리 두 명의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어머니가 된 다이애나 비는 자신이 어린 시절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두 왕자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왕족으로 특별대우를 받으며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시작한 봉사활동에 아이들을 대동하였으며, 그들이 궁궐 안에서 가정교사로부터 특별교육을 받기보다는 일반 학교에 가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다이애나 비의 사랑 속에서 월리엄과 해리 두 왕자는 영국 왕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두 왕자는 한시라도 왕실을 박차고 나오고 싶은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었으며, 고통스러운 왕실 생활 중에 유일하게 시름을 잊게 해주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미 결혼 초기에 찰스 왕세자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진 다이애나 비가 그나마도 15년간 영국의 왕세자비로 살았던 것은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이들에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편 찰스 왕세자와 왕실은 다이애나 비를 푸대접하였지만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결혼 초 남편의 부정에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 비의 모습은 대외적으로 아무리 행복을 연기한다 해도 어색함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갈구해도 돌아보지 않은 찰스 왕세자의 사랑을 단념하고 찰스의 아내가 아니라 진정한 영국 왕실의 왕세자비로서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비의 모습은 아름답게 변했다.

짧은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에 심플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며 자신의 소질인 봉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자리는 그녀의 자선활동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게 해 주었다. 그녀가 관여하는 자선활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녀를 도왔다. 그녀가 일반인 다이애나가 아니라 영국의 왕세자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해나갔다. 진심 어린 그녀의 봉사활동에 세계는 감동했다. 그녀의 인기는 왕실 가족 그 누구보다 더 높았다.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 비의 인기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저 왕세자를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 왕세자비가 필요했던 찰스 왕세자와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 비의 인기에 당황했다. 그들은 다이애나 비의 대외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찰스 왕세자가 가로채기도 하였다. 다이애나 비는 겨우 찾은 자신의 소명을 왕세자비라는 굴레로 인해 놓쳐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청춘과 사랑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새로 찾은 삶의 의미까지도 싹을 죽이려는 왕실에 분노한 다이애나 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신혼 초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징징대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1992년 그녀는 저명한 왕실 전문 작가를 찾아내 자신의 암담했던 결혼생활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발간 이후 별거를 선언하였다. 별거 후 1994년에는 이혼도 해 주지 않으면서 그녀가 날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는 왕실과 찰스 왕세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국 국영 방송 BBC와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에서 다이애나 비는 영국 왕실과 찰스 왕세자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결과는 자유였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인터뷰 직후 그녀와 찰스 왕세자를 불러들여 이혼을 지시했다. 1996년 8월 다이애나 비는 처녀 적 이름 다이애나 스펜서를 되찾으면서 왕세자비와 왕족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제2, 제3의 왕위계승권자인 월리엄과 해리 왕자의 어머니로서 왕실 가족으로 대우를 받았으며 웨일스의 공주(The Princess of Wales)라는 공식 직함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여전히 켄싱턴궁에서 살 권리와 거액의 위자료, 왕궁내의 사무실을 얻었다.

1997년 8월 30일 운명의 파리 이혼 후 1년간은 다이애나 스펜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친한 여자 친구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천국 같다’ 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었다 해도 봉사활동을 통해 쌓은 그녀의 세계적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왕세자비라는 답답한 옷을 벗어버리고 날개를 단 듯 더 자유롭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해나갔다. 그녀는 세계적 명사들과 함께 AIDS 환자들을 도왔고 대인지뢰반대 운동에 나서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남편 찰스 왕세자의 불륜에 지쳐 맞바람으로 대응하던 지난날의 음습한 남녀관계가 아닌 대명천지에 떳떳한 사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여름휴가를 애인과 함께 보냈다. 그녀의 애인은 영국 최고급 백화점인 해롯백화점을 운영하는 이집트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장남 도디 파예드였다.

도디 파예드는 ‘불의 전차’ 등을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였으며 다이애나 스펜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류층 사이에 꽤나 바람둥이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지중해에서 꿈같은 여름휴가를 보낸 두 사람은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는 도디 파예드의 호사스러운 아파트가 있었다. 도디 파예드는 이곳에서 다이애나에게 청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이애나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파리 시내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호텔이 제공한 벤츠에 오르자 그들의 연애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 던파 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동차를 따라 잡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카메라 세례를 벗어나기 위해 차는 과속했다. 그리고 운명의 지하차도로 접어들자마자 벤츠는 중심을 잃고 기둥으로 돌진했다.

차는 미끄러져 한 바퀴 돈 다음 반대방향으로 멈춰 섰다. 도디 파예드와 운전사 앙리 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이애나 스펜서는 앞자리와 뒷자리에 끼어 치명적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뒤따라오던 파파라치의 행렬이 차 옆에 섰다. 그들은 차의 뒷 문을 열고 죽어가며 괴로워하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향해 구조의 손길은 뻗치지 않고 카메라 플러시를 터뜨렸다. 스무 살, 찰스 왕세자와 데이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언론의 카메라 세례 때문에 고통받았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국의 왕세자비였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구조받지 못한 채 번쩍이는 카메라 불빛 속에서 36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다이애나 이후 변한 것들 15년간 영국 왕실에 청춘을 바치고 이제 막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찾아가려던 다이애나 스펜서의 급작스런 사고사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특히 그녀를 사랑했던 영국 국민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녀는 단순한 왕세자비가 아니라 영국 ‘국민들의 공주’로 사람들에게 재평가되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그녀가 살던 켄싱턴궁뿐만 아니라 여왕이 사는 버킹검궁 정문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왕실은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에 냉담했다. 이미 이혼으로 왕실을 떠난 사람에 대해 그 어떤 의무도 없다는 것이 왕실의 기본적 입장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왕실의 쌀쌀한 반응에 분노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젊은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종국에는 언론의 횡포 앞에 방치하여 비명횡사하게 한 책임을 왕실에게 묻고자 하였다. 국민의 깊은 애도와 비난에 당황한 영국 왕실은 관례를 깨고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도록 하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했다.

영국 정부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유지를 이어 항구적인 기념사업을 도모할 위원회를 설치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 직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음모론을 주장한 사람은 도디 파예드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예드였다. 영국 왕실이 유색 인종에다 이슬람교도인 자신의 아들과 다이애나가 결혼하려고 하자 자칫하면 왕위를 이을 윌리엄 왕자에게 혼혈 의붓 동생이 생길 것을 우려해 사고를 위장하여 그들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그는 암살의 주체가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이며 그 계획을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도왔다고 주장했다. 재력가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주장은 묵살되지 않았고 그 후 오랫동안 다이애나 스펜서와 도디 알 파예드의 죽음은 프랑스 경찰에 의해 수사되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 재판부는 다시금 이 사건은 운전자 앙리 폴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자동차 사고였다고 확정 지었다. 모하마드 알 파예드는 유감을 표시했지만 영국 왕실은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35년을 기다려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한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기 1년 전 카밀라 파커 볼스는 오랜 기간의 기만적인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했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볼스는 다이애나의 국민적 인기와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오랫동안 법적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2005년 마침내 30여 년 세월을 기다려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의 정식 부인이 되었다. 영국 왕실도 시대의 변화 속에서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왕실 가족으로 이혼녀 카밀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이혼녀라는 결함 때문에 비록 찰스 왕세자가 왕으로 즉위한다 하더라도 왕비의 호칭은 얻지 못하고 ‘왕의 배우자’라고 불릴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죽기 직전까지 ‘웨일스의 공주’라는 직함을 가졌던 다이애나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한 듯 찰스 왕세자가 겸직하고 있는 콘월 공작의 작위를 딴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호칭에 만족하고 있다.

다이애나의 두 아들 월리엄과 해리 왕자는 이제 30대가 되었다. 윌리엄 왕자는 2011년 4월 29일, 캐서린 미들턴이라는 평민 출신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엄격하고 전통을 고수하던 영국 왕실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은 다이애나 비라는 강하고 도전적인 여성이 왕실에 머물렀기에 가능하게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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