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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쌈 운명을 훔치다 16회 17회 18회 재방송 다시보기 이이첨의 난 최후

리베로수 2021. 6.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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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쌈 운명을 훔치다 16회 17회 18회 재방송 다시 보기 이이첨의 난 최후‘보쌈’ 조선 유일 적통 대반전 최고 10.2%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출생-사망 1560 ~ 1623.3.14

‘보쌈’ 신현수가 안방극장에 ‘조선 유일 적통’이라는 출생의 비밀로 대반전의 충격을 몰고 왔다. 시청률은 전국 9%, 최고 10.2%를 나타내며, 4주 연속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토요일 종편-케이블 프로그램 1위의 자리 역시 굳건하게 지켰다. (닐슨코리아 제공, 유료가구 기준)

지난 26일 방송된 MBN 종편 10주년 특별기획 ‘보쌈-운명을 훔치다’(극본 김지수·박철, 연출 권석장, 제작 JS픽쳐스·이엘 라이즈/이하 ‘보쌈’) 17회에서 수경(권유리)은 자신의 생존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이이첨(이재용)에게 ‘좌상대감’이라는 호칭으로 인사를 올렸다.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끊겠다는 의미였다. 때마침 바우(정일우)는 북방에서 돌아온 공으로 광해군(김태우)이 하사한 곡식을 나눠준다며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보는 눈이 많아지자 이이첨은 한발 물러섰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쏘아진 화살. 더 이상 광해군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이이첨은 그동안 은밀하게 준비해왔던 반정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금상이 백성의 고혈로 궁궐을 짓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의 은혜를 잊고 오랑캐와 손을 잡았다. 심지어 금상은 형제와 조카를 죽였고, 내인 김 씨와 공모하여 선대왕을 독살한 죄인이다”라는 내용의 벽서를 퍼뜨려 민심을 흔들었다. 그리고 대북파 사람들을 한 데 불러 모아 “암 군인 금상을 폐위하고, 종묘와 사직을 우리 손으로 바로 세우자”며 뜻을 함께 하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연판장을 만들어 세를 다졌다. 검과 조총을 축적한 무기고 역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보쌈 운명을 훔치다 18회 재방송 다시보기




이로써 수경의 거짓 장례를 치른 죄를 물으려 한다는 광해군의 속내를 파악한 이이첨은 화를 면하려는 다급한 마음에 가병들을 보내 수경을 없애려는 등 위협을 가했다. 이번엔 광해군이 직접 나섰다. 이이첨을 찾아가 지난 일들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며, 차후에 오늘 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장은 필패를 면치 못할 것이 뻔한 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단 혼란을 일단락시킨 것이다.

광해군의 최측근인 김개시(송선미)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사실 선왕을 독살한 이는 전란으로 피폐한 조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광해군이라고 판단했던 이이첨과 김개시였다. 이이첨은 당시 독이든 약밥을 올린 대령숙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잘못하다간 모든 죄를 덮어쓸 위기를 감지한 김개시는 대령숙수가 살아있다면 결국 이이첨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며, 바우에게 그를 찾아 죽여달라 지시했다.

이이첨의 반정 계획을 알고 있지만, 광해군도 믿을 수 없었던 대엽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바우에게 아버지 일은 자신이 해결하게 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는 몰래 연판장을 들고 빠져나오다 형 원엽(추연규)에게 발각됐고, 이이첨은 결국 가문을 등진 그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대반전이 펼쳐졌다.

이이첨이 “아기씨께서는 신의 아들이 아니오라, 선대 군의 장자이신 임해군 대감의 아드님이시옵니다”라며 대엽 앞에 무릎을 꿇은 것.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세자가 아닌 제삼자를 보위에 앉히겠다는 계획을 누구를 두고 세웠는지 드러난 순간이었다. ‘조선의 유일한 적통’ 대엽이 이이첨의 반정에 동참, 보위에 올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던 수경도 얻어낼지, 그의 선택에 이목이 집중된다.

MBN ‘보쌈-운명을 훔치다’ 18회는 27일(오늘) 일요일 밤 9시 40분에 방송된다. 본방송 시작 동시에 국내 대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웨이브(wavve)가 OTT 독점 공개한다.



이이첨
[ 李爾瞻 ]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출생-사망
1560 ~ 1623.3.14


관송(觀松)·쌍리(雙里)

별칭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

본관
광주(廣州)


득여(得輿)

본관 광주(廣州)이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광릉 참봉(光陵參奉)이라는 말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다. 하지만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경계를 받았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는 교사를 역임하여 신임을 쌓았으며 조식의 제자이자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가르침을 받았고 허균(許筠)과 친밀하게 지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동궁(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상궁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했다.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하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옹립했던 유영경 등은 모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이첨은 정운 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뒤 사사(賜死)하였으며, 광해군의 조카인 진릉군(晋陵君)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하였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과거(科擧)를 주관하게 된 것을 기화로 소북파(小北派)는 완전히 전멸하였으며 서인과 남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로써 대북파가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1613년(광해군 5년) 서양갑(徐羊甲)과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자백하게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안치하여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1617년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광해군이 호패법을 실시하려고 하자 정인홍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중단시켰는데, 이는 당시 이이첨과 정인홍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 임진왜란 때 소집된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힌 뒤 이튿날 참형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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