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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레이디 가가 열아홉살때 성폭행 당해 해리왕자 인터뷰

리베로수 2021. 5. 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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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레이디 가가 열아홉살때 성폭행 당해 해리왕자 인터뷰

 

레이디 가가(35)가 가수 생활을 막 시작한 초기이던 19살 때 한 음악 프로듀서에게 성폭행당해 임신했었으며 그에 따른 트라우마로 인해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었다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오프라 윈프리와 해리 왕자의 애플 TV+ 쇼 '당신이 볼 수 없는 나'(The Me You Can't See)에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 프로는 정신 건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본 디스 웨이'(Born This Way) '셸로우'(Shallow) 등을 히트시킨 레이디 가가는 자신이 성폭행당한 후 몇 년 동안 '완전한 정신착란'에 빠졌었다면서 "2년 동안 나는 (성폭행당하기 전의 나와)같은 소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가가는 만성적인 고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나중에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래미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한 바 있는 레이디가가는 프로듀서가 자신을 스튜디오에 가두고, 옷을 벗지 않으면 (자신의)음악들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프로듀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레이디 가가는 지난 2014년 하워드 스턴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프로듀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2013년 이를 바탕으로 한 '스와인'(Swine)을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미국 유명 알앤비(R&B) 가수 알 켈리(51)가 어린 소녀들을 집에 가둬두고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팝스타 레이디 가가(32)가 그를 공개 비판했다.

 

레이디 가가는 9일(현지 시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나는 성폭행 피해자들을 지지한다”며 장문을 글을 게재했다.

 

레이디 가가는 해당 글에서 “알 켈리에 대한 이야기는 변명의 여지가 없고, 소름이 끼친다”면서 그와 함께 작업한 노래 ‘두 왓 유 원트(Do What you want)’를 언급했다.

 

이어 해당노래에 대해 “나 스스로도 성폭행 피해자로 힘들었던 때 만든 노래”라며 “이제야 그 곡이 얼마나 왜곡됐는지 알았다”고 적었다.

 

그녀는 햇병아리 시절에 덮친 성폭행을 돌아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열아홉 살이었다. 난 이 업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 프로듀서가 ‘옷들 좀 벗지’라고 말하자 난 ‘안돼, 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내게 음악 경력을 다 망가뜨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멈출 줄 몰랐다. 그들은 내게 요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얼어붙어 아무 것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가해자 이름을 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난 이 #미투(MeToo) 운동을 이해한다. 난 몇몇이 이런 운동이 펼쳐지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다. 난 이 사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본명이 스테파니 저마노타인 가가는 지난 2014년 히트곡 ‘스와인’과 ‘틸 잇 해픈스’ 가사를 통해 처음으로 성폭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두 노래는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만연한 성폭행에 대한 다큐멘터리 ‘헌팅 그라운드’ 사운드트랙이었으며 2016년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뒤 2019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다룬 영화 ‘스타 이즈 번’에서 열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뒤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임신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년 뒤에도 그녀는 트라우마 때문에 “완벽한 조현증”과 “극단의 파라노이아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사실 조현증은 ‘스타 이즈 번’을 촬영할 때도 이어졌다고 했다.


가가는 그 트라우마가 자신을 통째로 바꿔놓았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도 여러 차례 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몸은 그 소름끼치는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2년 반의 시간이 흘러 회복됐다. 하지만 한 번 방아쇠가 당겨지면 신체적으로, 감정적 고통이 밀려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마무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다. 몇년의 노력 끝에 “스스로를 이 모든 역경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법을 배웠다. 시작하면 느리게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가가 외에도 글렌 클로즈, 올림픽 복서 버지니아 푹스, 유명 셰프 라샤드 암스테드 등이 정신적으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고 이겨낸 비결 등을 나누게 된다.


레이디가가

 

이탈리아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이자 행위 예술가, 배우, 사업가, 사회 운동가.

 

대표적인 직업은 가수인데 혁신적인 패션, 비디오와 대중적인 음악으로 전 세계를 쥐락펴락한 팝 아티스트이다. 팝 음악사 역대 가장 충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팝 아이콘 중 하나로 뽑히고, 아티스트로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천재 가수로 평가 받는다.

 

레이디 가가의 데뷔 이후 근 10년간 그녀가 팝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녀의 전성기 시절은 대중음악씬 자체의 판도를 뒤바꾸었으며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레이디 가가를 카피하고 또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다수의 메가 히트곡들과 3,500만 장의 앨범 판매고, 견고하고 커다란 팬덤을 보유 중이다. 뛰어난 가창력과 전위적이고 예술적인 무대연출로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을 선보이며 자신의 모든 정규 앨범의 곡을 작사, 작곡하는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이다.

 

전성기 시절엔 파격적인 의상과 인터뷰로 전 세계적으로 기삿거리들을 제공하며 미디어를 쥐락펴락했다. 여기에 더해 피아노 실력마저 뛰어나 아티스트로서 모든 것을 전부 갖춘 완전체, 천재 아티스트란 찬사가 따르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또한 그래미 트로피를 11개 보유 중이고 MTV VMA 트로피를 13개 보유하고 있어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몇 안 되는 가수. 자신의 팬덤에게 이름을 붙히고 팬들만이 활동할 수 있는 사이트를 직접 만들면서 팬들에게 연대감과 소속감을 부여한 아티스트의 시초이기도 하다.

 

여기에 2018년에는 영화 스타 이즈 본으로 성공적인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첫 주연 작품부터 바프타 시상식,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는 등 배우와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았다.

 

2011년 롤링 스톤의 기획 기사 Introducing the Queen of Pop에서 가장 높은 종합 평가로 "팝의 여왕" 호칭을 받은 바 있다.


출생과 데뷔

 

가톨릭 계열의 보수적이면서 매우 부유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가정에서, 1986년 3월 28일 뉴욕 맨해튼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또한 캐나다계 미국인으로서 프랑스계의 혈통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계인 만큼 집안은 가톨릭을 믿으며, 레이디 가가는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가톨릭 미션스쿨인 Sacred Heart 여학교를 졸업했다. 패리스 힐튼도 이 학교 출신인데, 힐튼이 5살 연상으로 선배이다.

 

4살 때 악보 없이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13살 때 첫 작곡, 14살 때 첫 공연을 했다고 한다. 즉, 천재다. 그리고 17살 때 뉴욕대학교의 티시 예술대학(Tisch School of the Arts)에 조기 입학했으나, 음악적으로 견해가 안 맞고 사람들이 자신의 패션이나 스타일을 조롱해서 자퇴했다고 한다. 이때 대학 사람들은 "스테파니 저머노타, 넌 절대 유명해지지 못할 거야"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 레이디 가가를 조롱했는데, 훗날 레이디 가가가 <스타 이즈 본>으로 오스카를 타고 난 후 이 페이스북 그룹이 재발굴되어 이들이 역으로 조롱을 받았다.

 

19살에 한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지만 3달 만에 잘리고 나서 충격을 먹어, 클럽 등을 전전하며 야시시한 공연이나 스트립 댄스, 마약 등을 하며 세월을 보낸다. 결국엔 찾아온 아버지에게 마약을 복용하다 걸렸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한동안 원활하지 않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그러다가 음반 제작자인 롭 푸사리(Rob Fusari)를 만나는데, 가가의 가창 스타일을 프레디 머큐리와 비교하여 '레이디 가가(Lady Gaga)'라는 예명을 붙여준다. 퀸의 노래 중 Radio Ga Ga에서 따온 것. 음악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도 말했다. 그녀가 펑크와 록 음악 등을 통해 현재의 음악적 스타일을 완성하기 이전에는 다소 작위적이고 연극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 전위 예술가인 레이디 스타라이트를 만나는데, 그전에도 특이했지만 이 사람을 만나면서 가가의 행위예술은 더욱 전위적으로 변한다. 같이 공연을 하면서 꽤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던 와중 흑인음악의 큰손 에이콘과 연줄이 닿아 켈리 클락슨, 푸시캣 돌스,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의 노래를 작사, 작곡해 주게 된다.

 

하지만 혼자 한 건 아니고 상당수가 공동 작사 혹은 공동 작곡이다.이러던 중 에이콘은 그녀가 가창력 역시 뛰어나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레이디 가가는 2008년에 1집 앨범 The Fame을 발매하게 된다.


한편 해리 왕자는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잃은 충격이 계속되면서 28∼32세 때 악몽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구 술을 마시고 약물에 취했다. 감정을 덜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기꺼이 시도했다”며 “주말 밤이면 일주일치 술을 마셔버리곤 했는데 좋아서가 아니라 뭔가를 가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공식 역할을 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맬 때마다 거울을 보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가자’고 말하곤 했다. 집을 나서기도 전에 나는 땀을 쏟고 있었고 전투나 비행 모드였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과 정의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를 쫓아 터널로 간 자들이 차 뒷자리에서 숨이 멎고 있는 어머니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운구 행렬을 따라 걸었던 일에 관해 “가장 기억나는 것은 말발굽 소리”라면서 “내가 몸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보이는 감정의 10분의 1만 드러내면서 그냥 남들의 기대에 따라 걸었다”고 말했다.

 

오래 전 다이애나빈이 사진사들에게 쫓기면서 울고 있을 때 그 차 뒷자리에 앉아있던 기억에 관해서도 털어놨다. 그는 “카메라 찰칵 소리와 불빛이 내 피를 끓게 한다”며 “어머니에게 벌어진 일과 내가 어릴 때 경험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더니 이후 “정신적으로 엉망이 돼버렸다”고 고백했다.

 

해리 왕자는 부인 메건 마클이 소셜 미디어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정말 막막했고 가족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과 무시였다고 폭로했다. 마클은 엄마를 잃은 남편이 부인과 뱃속 아기까지 잃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서 극단적 생각을 접었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어머니는 백인이 아닌 사람과 만나다가 쫓겨서 죽음에 이르렀는데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라”며 “그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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