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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자유시참변 연도 1921년

리베로수 2021. 8. 1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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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自由市慘變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연도 1921년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 셰프 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 보병 자유 대대(이하 자유 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 전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사할린 부대·이항(尼港) 군대라고도 불린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 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 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 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 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 이리 아는 자유 대대의 오하 묵(吳夏默)·최고려(崔高麗) 등과 군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 대대는 원래 대한 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 공화국 인민 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 부대이며, 대한 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 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 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 계 인물인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 이리 아는 군 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 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 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는 양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 혁명 군정 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 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 이리 아는 이에 불복했으나, 홍범도·안무(安武)의 부대가 마 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 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 셰프 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 대도 29 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당시 희생자 수는 자료마다 서로 다른데, <재로 고려 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 포로 864, 행방불명 59명으로, <간도지방 한국 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박 이리 아는 무사히 탈출했다. 고려 군정 의회는 포로 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켰으며, 다른 무장부대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자유시 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 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

 

 

 

 

 


유해 봉환 속 "참변 가담해 反공산주의 계열 독립군 학살" 주장 나와
"홍 장군, 독립군 신속한 통합에 관심"…'참변 가담' 기록 없어
참변 후 군사재판 참여 두고 왜곡 주장…'독립군 궤멸' 주장도 과장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독립기념관은 서거 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1868∼1943년)의 생전 미공개 영상과 사진 등 16점을 17일 공개했다. 사진은 1922년 1월 홍범도 장군의 모습. 2021.8.17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송환되면서 일부 보수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홍 장군이 독립군이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1921년 독립군 간 주도권 다툼으로 벌어진 자유시 참변에 홍 장군이 가담해 같은 독립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자유시 참변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극동 공화국 소재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이 세력간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일으킨 사건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주된 해석이다.

유해 봉환을 비판하는 측은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극동공화국 군대와 함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계열의 독립군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8일 오전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에서 묵념하고 있다.

자유시 참변 원인은 이념 대립 아닌 독립군 간 주도권 경쟁

홍 장군에게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우선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 탄압이 거세지자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상당수 독립군 부대가 1921년 1∼3월 자유시에 모여 독립군 통합을 논의했다.

일제와 적대관계인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항일 무장투쟁을 지속하겠다는 의도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보면 이때 모인 독립군 수가 2천∼2천300명 정도였다.

통합 논의 초기에는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局)이 지원한 대한의용군이 통합 주도권을 쥐었으나, 1921년 4월 '극동지역 볼셰비키 혁명 사업'이 러시아 공산당에서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통합 조건을 두고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1921년 6월 28일 더는 독립군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극동 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명목 등으로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주도권을 쥔 고려혁명군 주력부대인 오하 묵, 최고려 등이 이끄는 한인 자유 보병대대가 극동 공화국 군대와 함께 대한의용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자료는 없다.

즉 자유시 참변이 독립군 간 주도권 경쟁이 원인이 돼 벌어진 참사는 맞지만,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계열의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이거나, 적어도 러시아 공산당 또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가려는 독립군이었고 참변의 원인도 이념 대립이 아닌 독립군 주도권 다툼이었던 것이다.

독립군 연구의 대가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19일 연합뉴스에 "당시 국제정세상 독립군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가려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했고 그래서 많은 독립군이 자유시에 모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복잡하게 얽힌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왜곡된 주장(이념 대립)으로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홍 장군 자유시 참변 가담 기록 전혀 없어…"참변에 통곡" 증언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고려혁명군 편에서 대한의용군 소속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도 낭설에 가깝다.

1921년 3월께 자유시에 도착한 홍 장군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었다.

양측 모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던 홍 장군으로서는 통합 주도권의 향방엔 관심이 없었고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돼 항일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공식 사료에도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기록은 있지만, 이는 신속한 사태 수습을 원한 고려혁명군 측이 독립군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홍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추대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자유시 참변 연구 권위자인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에 "홍 장군이 고려혁명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하고, 참변 이후 벌어진 군사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라고 설명했다.

독립기념관이 17일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기념으로 미공개 영상 자료 기증식을 열었다.
사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인 원동민족 혁명단체 대표회 개막식 촬영 영상 속 홍범도(왼쪽)·최진동 장군.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궤멸했나

보수성향 커뮤니티들에선 또 자유시 참변으로 자유시에 모였던 2천여 명의 독립군 중 700∼800명이 사망해 사실상 독립군이 궤멸했다는 주장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보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의 주장으론 사망자가 36명,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집계로는 전투 중 사망, 익사, 행방불명 인원이 총 600여 명이다.

또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소속 군인이 864명이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사망자가 700∼800명이라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대한의용군 병력이 1천 명 내외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윤상원 교수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고려혁명군 중심으로 모인 독립군이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했다"면서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립군이 궤멸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홍범도 洪範圖  한말의 독립운동가.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 군이 되어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고려 혁명 군관학교를 설립했다.


홍범도


출생-사망
1868.8.27 ~ 1943.10.25



여천


별칭
범도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평북 자성(慈城)


주요 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일명 범도(範道)라고도 하며, 호는 여천(汝千)이다.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甲山)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 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과 함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한 뒤 삼수(三水)·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北靑)·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惠山)·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朴永信)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 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 혁명 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썼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을 겪은 뒤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 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196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 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질오르다 중앙 공동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홍범도 연보
출생 1868.8.27~ 사망 1943.10.25
1868

8월 27일 평북 자성에서 출생.

1907

일제의 무기 회수에 반발하여 북청과 후치령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임.

1910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

1911

부하 박영신에게 함북 경원 수비대를 습격하도록 함.

1919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해 일본군 습격,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둠.

1920

6월, 봉오동전투에서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대승을 거둠.
10월, 청산리전투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

1921

러시아령 흑하 자유시로 이동하여 고려 혁명 군관학교 설립.
6월, 자유시 사변을 겪은 뒤 이르쿠츠크로 이동.

1937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1943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사망.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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