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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16개국 기간 71주년 사망자 휴전 원인

리베로수 2021. 6. 2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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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기간 71주년 사망자 휴전 원인

6·25 전쟁
 Korean Conflict , 六二五戰爭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 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 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 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 결의 195 Ⅲ호) 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25 전쟁 교전국 참전 16개국

 

 

 


70년 만에' 6·25 전쟁 참전 유공자에게 훈장 전달


故 김종산 하사 유족, 훈장증·충무무공훈장 받아

25일 조길형 충북 충주시장(오른쪽)이 금가면에 사는 6·25 전쟁 참전 유공자 故 김종산 하사 유족에게 충무무공훈장을 국방부를 대신해 전달하고 있다.
70년 만에 6·25 전쟁 참전 유공자 후손에게 훈장이 전달됐다.

25일 충북 충주시에 따르면 조길형 시장은 금가면에 사는 故 김종산씨 유족인 김진자 씨에게 국방부를 대신해 훈장증과 충무무공훈장을 전수했다.

故 김종산씨는 국방부가 추진하는 '6·25 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사업으로 국가유공자로 확인됐다. 6·25 전쟁 때 육군 2 보병사단 소속으로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됐는데, 당시 긴박한 전장 상황으로 훈장을 받지 못했다.

이날 훈장 전달은 보훈단체장 간담회에서 진행해 의미를 더했다.

시는 보훈회관에서 지역 9개 보훈단체 임원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고 국가 유공자들의 복지와 보훈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이날 보훈단체 관계자들은 국가보훈대상자 지원 확대와 보훈단체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시에 요청하기도 했다.

조 시장은 "6·25 전쟁 당시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업적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며 "국가유공자 사회적 예우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시는 지난 2월 조례를 제정해 국가유공자 우선주차구역도 운영하고 있다. 충주에는 3700여 명의 국가유공자가 등록돼 있다.

6·25전쟁
발생 시기
주요 사건
1949년

 

625전쟁 원인


남침에 대한 증거
1950년 6월 초순 束草(속초)에 집결한 北傀軍(북괴군) 제766부대와 제549부대는 漁雷艇(어뢰정) 4척과 1,000톤급 무장수송선 1척의 엄호 아래, 발동선 30척, 帆船(범선) 40척 그리고 견인용 화물선 4척, 도합 79척으로 2개 船團(선단)을 편성하였다.

그들은 6월 25일 03시쯤 제 549부대의 1개 중대규모가 正東津里(정동진리) 등명동 해안에 상륙하여 海岸橋頭堡(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후, 주력부대는 발동선과 帆船(범선)으로 같은 장소에 상륙하였다. 상륙을 완료한 적은 山城隅里(산성우리) 본동마을에 위치한 대한 흑연 무연탄(주)강릉 광업소 사무실을 急襲(급습)하여 숙직하던 광업소 경리과장 沈景燮(심경섭 : 대한청년단 강릉 군단 총무부장 겸무) 이하 4명의 직원을 납치하였다.

증거 자료
중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986년판):'북한의 불시남진'


일본 공산당 부위원장 니시자와 토미 요의 "6·25 북침설은 허구로서, 당시 미군 전투부대는 한국에 주둔하지 않았다"라는 발언.

 

유고 공산당 기관지 「브에스닉」에는 6·25 남침 사실을 갖가지 상항으로 묘사했는데, 이중 '2개의 국가와 2개의 정치체제가 분단된 채 한반도의 미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을 넘어 남진했다'라고 기술한 부분


유고 백과사전엔 '한국전쟁을 1950년 6월 25일 북한 군대가 38도선을 넘어 먼저 남침하여 발발'이라고 적고 있음.


38도선 초기 전투(1982.12.01,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p214~222)


소련과 중국의 전쟁 참여의사와 함께 스탈린의 전략이 담긴 북한군 정보계획(1950.10.04, 서울에서 노획)


북한군의 선제타격 계획 상황도 사본(1952,08.02,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코르트코프 박사로부터 입수)


일본 공산당 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오다마나 사의 "6·25 동란은 북한이 한국을 무력으로 해방시킴으로써 한 번도 의 적화통일을 획책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라 밝힌 것.
 
북한, 소련과 '조소 군사비밀협정' 체결.
남한에서 주한미군 철수.

1950년

미국, 애치슨 라인 발표.

1950년 6월 23일

국군, 비상경계령 해제.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1950년 6월 25일

북한, 38선 전역에 걸친 국군 방어 진지 기습공격 개시. YAK전투기 서울 상공에 침입.
미국,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즉시 소집 요구. 미국 결의안 채택(소련 결석)해 북한군 철수 요구.

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 원조를 권고하는 결의 채택.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 상륙작전.

1950년 10월

유엔군,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

1950년 12월

북한지역에서 유엔군 철수.

1951년 1월

대한민국 정부 서울에서 철수.

1951년 2월

유엔 총회, 중공군 철수 요구.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1년 10월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김.

1952년 10월

공산 측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문제로 유엔군 사령부 회담 중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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