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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부인 질병 죽음 벌거벗은 세계사 재방송 다시보기

리베로수 2021. 7. 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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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부인 질병 죽음 벌거벗은 세계사 재방송 다시보기 루이 14세 프랑스의 영광을 이룬 절대군주 Louis XIV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 사이에서 뒤늦게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3년 루이 1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다섯 살밖에 안 되는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릴 적에는 재상 마자랭의 통치가 이어졌으나 프롱드 난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661년부터 루이 14세는 재무대신 콜베르의 활약으로 친정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막대한 재정수입을 바탕으로 수많은 전쟁들과 건축 사업을 벌여 전례 없는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콜베르 사후 계속되는 전쟁과 낭트 칙령 폐지, 흉작과 기근 등으로 국가재정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아들과 손자들의 요절과 더불어 왕위를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물려주고 사망하였다.

 

 


루이 14세 초상화

공식 칭호
루이 14세(Louis XIV), 프랑스 왕


별칭
대왕(le Grand), 태양왕(Roi Soleil)


지역
프랑스


재위기간
1643년 ~ 1715년


출생 - 사망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


가족관계
부친 : 루이 13세(Louis XIII, 1601년 ~ 1643년, 재위 1610년 ~ 1643년)
모친 :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년 ~ 1666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의 딸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안나


계보
전임자 : 루이 13세(Louis XIII, 1601년 ~ 1643년, 재위 1610년 ~ 1643년)
후임자 : 루이 15세(Louis XV, 1710년 ~ 1774년, 재위 1715년 ~ 1774년)


초기 생애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 사이에서 뒤늦게 태어난 장남으로 1643년 루이 1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모후 안 도트리 슈가 섭정직을 맡았으나 사실 모든 국정은 리슐리외의 후계자인 마자랭이 물려받아 리슐리외의 노선대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어려서부터 라틴어, 역사, 수학, 이탈리아어 등 왕이 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고 소질을 보였던 분야는 예술 분야였다. 어린 루이 14세는 회화와 건축, 예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춤에 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일곱 살에서 스물일곱 살 때까지 20년 동안 매일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했다. 이러한 춤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미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프랑스 왕정 체제에 저항한 지방분권 대귀족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프롱드 난이 루이 14세에게 굴욕적인 경험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돌팔매’에서 유래한 ‘프롱드 난‘은 주로 리슐리외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마자랭의 정책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루이 14세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점은 봉기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켰다.

1648년에는 마자랭의 과세정책에 반발하는 고등법원의 봉기에 파리 시민들이 가세하여 루이 14세는 파리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고, 1650년에는 콩데 공 루이 2세의 주도로 전개된 대귀족들의 프롱드 난이 발생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 두 차례의 프롱드 난은 루이 14세보다는 마자랭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사건들이었지만, 이제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루이 14세에게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따라서 향후 지방 대귀족들에 대한 권력 약화와 절대주의적 정책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마자랭이 두 차례에 걸친 프롱드 난을 진압해 나가자 1652년 루이 14세는 파리로 환궁할 수 있었다. 1653년 프롱드 난이 완전히 진압된 후 루이 14세는 열여섯 살이 되는 1654년에야 축성식을 치를 수 있었는데 그 이후로도 국정은 모두 마자랭이 담당하였다. 1660년 스물두 살이 된 루이 14세는 에스파냐와의 화평을 위해 펠리페 4세의 딸 마리-테레즈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사실 루이 14세와 마리-테레즈의 결혼은 이중적인 사돈관계의 결실이었다. 루이 14세의 모친 안 도트리슈는 마리-테레즈의 부친인 펠리페 4세와 남매 관계였고, 마리-테레즈의 모친인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부친인 루이 13세와 남매 관계였기 때문이다. 즉 마리-테레즈는 루이 14세의 고종사촌(고모 엘리자베트의 딸)이자 이종사촌(외숙부 펠리페 4세의 딸)이었다.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의 평화회담, 펠리페 4세 뒤에는 마리-테레즈


친정 전반기
1661년 3월 국정 전반을 관장하던 마자랭이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리슐리외나 마자랭과 같은 수석국무대신 체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왕국의 국정을 관장하는 친정 체제를 선포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추진한 정책은 행정 및 재정 개혁이었다. 루이 14세는 프롱드 난이 진압된 평화로운 프랑스를 마자랭에게 넘겨받은 듯이 보였지만 실제로 국고는 바닥이 나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사망한 마자랭이 평생 축적해 놓은 재산이 웬만한 귀족들의 재산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루이 14세는 부정축재 혐의에 대해 매우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대부이자 프랑스를 이끌었던 고인 마자랭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서 그가 구축해 놓은 왜곡된 재정 체계를 개혁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자랭의 후계자로 급부상하면서 권력의 핵심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던 자들이 바로 장 바티스트 콜베르와 니콜라 푸케였다. 콜베르는 마자랭의 재정담당관으로 그의 막대한 부정축재와 연관된 자였지만 마자랭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루이 14세는 오히려 부정축재의 증거가 명백했던 푸케를 대역죄까지 뒤집어씌워 감옥에 처넣었다.

이후 시작된 이른바 정의법정은 지난 기간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재물을 착복한 재정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것은 선전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정의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푸케 일파에 대한 콜베르 일파의 보복의 성격을 띠었으며, 콜베르 일파에 의한 새로운 인맥의 구축으로 나아갔다. 즉 그것은 루이 14세가 순진하게 내세웠던 구조적 개혁이라기보다는 부패척결을 빌미로 내세운 파벌들 간의 자리바꿈에 불과했다.


루이 14세의 치세는 1682년 또는 1683년을 기점으로 크게 양분된다. 1682년은 바로 루이 14세가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에 정착한 해였고, 1683년은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재무대신 콜베르가 사망한 해였다. 앞선 시기가 루이 14세의 치세가 승승장구하면서 유럽 세계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드러낸 때였다면, 뒤의 시기는 무리한 전쟁과 정책들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왕정의 상황이 악화되어 갔던 기간이었다. 먼저 치세 초기에 루이 14세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프랑스 영광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전까지 프랑스를 괴롭혀 온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냐를 무력화시키고자 하였고, 나아가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욕심도 내비쳤다.

어쨌든 명목상 정의법정의 활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혁으로 비추어져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인사들과 절연한 새로운 인물들의 정계 진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물들은 콜베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나아가 루이 14세는 이와 같은 행정 및 재정 개혁을 바탕으로 군대와 사법에 대한 개혁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아서 유럽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상비군 체제와 뛰어난 포병 및 공병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유럽을 휘어잡고 있었던 상업 및 금융의 중심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야망은 1667년 에스파냐에 대한 왕권 이양 전쟁과 1672년의 대 네덜란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 전쟁들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도, 그렇다고 크게 패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전황은 늘 프랑스에 어느 정도 유리하게 흘러갔고, 이는 루이 14세에게 새로운 전쟁 의지를 북돋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전승들의 연속은 단기적으로는 루이 14세의 영광을 증명하였으나 결국 장기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프랑스에게는 백해무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유럽에서는 루이 14세가 보여 주고 있는 절대왕정의 궁정문화가 왕족과 귀족생활 방식의 전범으로 확산되어 나가고 있었다. 풍부한 생산력과 많은 인구, 이를 바탕으로 한 막대한 국가재정 확보와 상비군의 유지,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 예절과 생활방식 등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루이 14세라는 공동의 적을 흠모의 대상으로도 인식하게끔 하였다.

프랑스의 영토 확장
1552년 앙리 2세 치세-1789년 프랑스 혁명
이러한 궁정생활의 정점은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베르사유 궁은 1660년대부터 별궁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지다가 1677년 본격적인 왕의 거처로 사용되기 위한 공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프롱드 난 이후 파리를 떠나 파리 외곽 지역의 다른 별궁들에서 정사를 진행하던 루이 14세는 연이은 승전으로 한껏 자부심에 부풀어 올라 새롭게 건축될 베르사유 궁을 새로운 왕권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프롱드 난 당시 성난 파리 민중들의 봉기에 대한 트라우마와 여전히 잠재적인 반란 세력인 지방 귀족들을 왕권 아래 길들여야 할 필요성, 이 두 가지 사안들이 베르사유 건축의 중요한 동인들로 작용했다.

1685년부터 지방 귀족들은 베르사유에 하나둘씩 베르사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베르사유 궁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일상에 눈이 멀어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총애와 후견제의 그물망에 걸려들어 갔다. 다른 한편 절대주의 왕권의 상징이 된 베르사유는 프랑스 국정의 중심이자 전 유럽 군주들에게 궁정생활의 모델이 되었다. 일례로 1747년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이 베르사유 궁을 모델로 상수시 궁을 건축하기까지 했다.

루이 14세가 추구한 프랑스의 영광은 단지 유럽 대륙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16세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주도한 대항해 시대의 주도권이 17세기에 네덜란드로 넘어간 후 프랑스 또한 잉글랜드와 함께 그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먼저 루이 14세 당시에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미시시피 강 유역을 탐사하면서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루이지안(루이지애나)’라 명명하고, 북아메리카 중부 전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식민지를 선포하였다. 그밖에도 루이 14세는 오스만 제국, 모로코, 페르시아, 시암 왕국 등과도 교류하였고, 아르카디오 황(黄嘉略)과 같은 중국인 예수회 회원을 궁정 사서로 임명하기도 했다.

친정 후반기
1680년대는 루이 14세 권력의 절정기였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자부심은 곧 오만함으로 바뀌었고 대내외 정책에 있어 잦은 무리수를 동반하였다. 그의 정책이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성공했다 할지라도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 준 경우가 드물었다. 1682년 베르사유에 정착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정을 권력의 중심지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나 1683년 금욕주의적이고 치밀한 정책가인 재무대신 콜베르가 사망하고 에스파냐와의 평화를 확인해 주었던 왕비 마리-테레즈가 사망한 이후, 특히 1691년 육군대신 루부아가 사망한 이후부터 루이 14세의 욕망과 자아도취를 제어할 인물들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대신 루이 14세 주변에서 그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세 파벌들이 형성되었다. 그중 첫 번째로 가장 강력했던 파벌은 1683년에 루이 14세와 비밀결혼을 올린 맹트농 후작부인의 파벌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견제하고자 하는 인사들이 권력의 무대에서 배제된 루이 14세의 아들 대세자 루이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세자의 무능력한 모습에 실망한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총기를 보여 주고 있던 세손 부르고뉴 공작 루이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문제는 루이 14세가 대세자 루이와 세손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 모두를 잠재적인 권력의 도전자로 간주하며 경계심을 보이는 한편, 맹트농 후작부인에게는 국정은 물론 모든 일에 있어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루이 14세의 실정은 1685년 낭트 칙령의 철회로 시작되었다. 그의 조부인 앙리 4세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타협책으로 반포한 낭트 칙령은 루이 13세 이래로 지속되어 오던 개신교 탄압의 결정판이었다. 물론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행한 탄압은 어디까지나 개신교로 하여금 왕권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끝난 것이었다면,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 철회로 프랑스 왕국 내에 모든 개신교를 철저하게 추방하고자 했다. ‘하나의 왕, 하나의 왕국, 하나의 믿음’이라는 그의 표어는 왕국에 획일적인 원칙을 부과하려는 과도한 정치적 욕망의 산물이었다. 단기적으로 개신교도의 추방은 왕국의 통일성과 막대한 재정에 기여했을지 몰라도 3~4만 명에 이르는 우수한 상공업 경제 엘리트들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프로이센으로 유출되어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 14세 치세의 후반부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1688년에서 1697년까지 루이 14세에 대항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잉글랜드,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웨덴, 사보이 공국 등)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여 9년 동안 전쟁이 전개되었고, 1701년부터 1714년에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필리프가 에스파냐 왕위(펠리페 5세)에 오르게 되면서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전개되었다. 이 장기간의 전쟁에서 루이 14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수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는 막대한 재정적 출혈을 초래하였다.

루이 14세가 평화를 원하는 때에도 다른 많은 군주들은 그를 견제하고자 끊임없이 도발하였다. 1714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을 당시 프랑스 정부 부채는 20억 리브르라는 전대미문의 액수에 달했다. 이는 18세기 동안 고질적으로 프랑스 정부를 괴롭힐 만성적인 재정 악화는 물론 이를 메꾸려는 수많은 불건전한 미봉책들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1713년에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루이 14세는 프랑스 국경과 에스파냐에서 펠리페 5세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에스파냐는 다른 수많은 영토들을 오스트리아에 양도해야 했다. 프랑스 또한 북아메리카 대륙 영토 일부를 잉글랜드에 양도해야만 했다.

1714년 직계 후손들에게 닥친 불운 속에서 루이 14세의 뒤를 이을 적장자 후손은 둘밖에 없었다. 그 첫 번째는 에스파냐 왕이 된 둘째 손자 펠리페 5세와 증손자인 네 살짜리 아이 루이였다. 하지만 펠리페 5세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으며, 병약한 증손자 루이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증손자 루이의 사망이 발생할 경우 그다음 왕위 계승권을 맹트농 후작부인 이전 애첩이었던 몽테스팡 부인의 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즉 루이 14세의 서자인 이들은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과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으로, 맹트농 후작부인은 이 두 아이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이들을 내세워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권력 장악을 제한하고자 했고, 맹트농 후작부인 또한 이들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1715년 9월 1일 프랑스의 영광 그 정점에 올라 국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했던 태양왕 루이 14세는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섯 살에 불과한 증손자 루이가 루이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서자인 멘 공작과 툴루즈 백작은 곧 실각하고 말았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는 바로 최고사법기구인 고등법원을 찾아가 서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한 루이 14세의 유언이 프랑스 왕위 계승과 관련한 기본법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에 찬성한 고등법원이 루이 14세의 유언장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모든 권력은 루이 15세의 섭정을 담당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맹트농 후작부인의 파벌은 붕괴되어 가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세계사’ 루이 14세 역작 베르사유 궁전, 귀족 조련소?

tvN '벌거벗은 세계사(김형오, 이윤호)'에서 프랑스의 절대권력, 루이 14세의 일생을 파헤친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지난 17회 수도권 가구 기준 시청률이 평균 3.5%, 최고 4.2%를 돌파하며 4주 연속 상승세를 기록 중이다. (유료플랫폼 기준/닐슨코리아 제공)

상승세를 이어갈 오늘(6일, 화) 방송되는 18회에서는 선문대학교 역사·영상 콘텐츠학부 임승휘 교수가 강연자로 나선다.

임승휘 교수는 책 '절대왕정의 탄생', '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등의 저자로,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며 21세기형 역사학도를 양성하고 있다. 임 교수는 파란만장했던 루이 14세의 삶과 그의 역작, 베르사유 궁전의 비밀 등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눈을 뗄 수 없는 강연을 예고한다.

우선 프랑스 왕들 가운데 최장기 집권, 압도적 카리스마와 절대 권력으로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삶을 재조명한다. 출생의 비밀부터 어린 루이 14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 등을 짚어보며 그는 왜 신격화된 지배자가 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한 루이 14세의 역작이자 '인간이 만든 신의 건축물'로 불리는 베르사유 궁전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공개된다. 베르사유 궁전이 사실은 귀족들을 길들이는 '귀족들의 조련 소'였다는 이야기에 MC 군단 은지원, 규현, 이혜성 모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 '에티켓'으로 가스 라이팅을 하는 등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화하고 이용했던 루이 14세의 치밀하고 철저한 '덫'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외에도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을 손안에 넣고 싶었던 루이 14세의 전쟁광의 면모와 종교 탄압, 루이 14세가 시달렸던 충격적인 질병 리스트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도 펼쳐진다.

이날 방송에는 외교관 후보생들의 프랑스어 선생님인 국립외교원 강사, 올리비아와 단골 여행 메이트인 벨기에에서 온 줄리안이 게스트로 출연한다. 프랑스, 그리고 유럽에서 루이 14세가 떨쳤던 권력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언택트 세계사 여행의 재미를 더할 전망이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전 세계 곳곳을 언택트로 둘러보며 각 나라의 명소를 살펴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역사를 파헤치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화요일 밤 10시 30분 방송된다.



가족 관계
• 루이 14세 배우자 부인
- 마리-테레즈 도트리슈(Marie-Thérèse d'Autriche, 1638년 ~ 1683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와 루이 13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딸(루이 14세와 사촌 간)
- 프랑수아즈 도 비녜(Françoise d’Aubigné, 1635년 ~ 1719년), 일명 맹트농 후작부인, 앙리 4세의 장군 아그리파 도 비녜의 손녀
- 몽테스팡 부인(Madame de Montespan, 1640년 ~ 1707년), 루이 14세의 애첩(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왕비 당시 애첩, 맹트농 후작부인의 등장과 더불어 실총 당함)

• 자녀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소생
- 루이(Louis, 1661년 ~ 1711년), 대세자
- 안-엘리자베트(Anne-Élisabeth, 1662년 출생 후 사망)
- 마리-안(Marie-Anne, 1664년 출생 후 사망)
- 마리-테레즈(Marie-Thérèse, 1667년 ~ 1672년)
- 필리프-샤를(Philippe-Charles, 1668년 ~ 1671년)
- 루이-프랑수아(Louis-François, 1672년 출생 후 사망)

 

 

 

 


몽테스팡 부인 소생(서자)
-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Louis Auguste de Bourbon, 1670년 ~ 1736)년, 멘 공작
- 루이-세자르 드 부르봉(Louis-César de Bourbon, 1672년 ~ 1683년), 벡생 백작 및 생제르망 데프레 수도원장
-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Louise Françoise de Bourbon, 1673년 ~ 1743년), 콩데 공 루이 3세의 부인
- 루이즈 마리 안 드 부르봉(Louise Marie Anne de Bourbon, 1674~1681년)
-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Françoise Marie de Bourbon, 1677년 ~ 1749년),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부인
-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Louis Alexandre de Bourbon, 1678년 ~ 1737년), 툴루즈 백작

 

 

 

벌거벗은 세계사 재방송 다시보기

 

 


대세자 루이의 자손(루이 14세의 손자)
- 루이(Louis, 1682년 ~ 1712년), 세손, 부르고뉴 공작, 루이 15세의 부친
- 필리프(Philippe, 1683년 ~ 1746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5세(재위 1724년 ~ 1746년)
- 샤를(Charles, 1686년 ~ 1714년), 베리 공작


세손 루이의 자손(루이 14세의 증손자)
- 루이(Louis, 1704년 ~ 1705년), 브르타뉴 공작
- 루이(Louis, 1707년 ~ 1712년), 브르타뉴 공작
- 루이 15세(Louis XV, 1710년 ~ 1774년, 재위 1715년 ~ 1774년), 프랑스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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