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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서거 사망 젊은시절 아들 업적 생애

리베로수 2022. 9. 1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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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서거 사망 젊은 시절 아들 업적 생애

출생

1926년 4월 21일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메이페어 브루턴 거리 17번지

사망

2022년 9월 8일 (향년 96세)[1]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밸모럴 성 장례식 2022년 9월 19일(예정)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기간

영국 및 영연방 왕국의 여왕 1952년 2월 6일 ~ 2022년 9월 8일

내 삶이 길든 짧든 평생토록 국민을 섬기는 데 헌신할 것임을 여러분 앞에 선언합니다.

I declare before you all that my whole life whether it be long or short shall be devoted to your service.

1947년 4월 21일 공주 시절 남아프리카 연방[6] 케이프타운에서 21세 생일을 맞이하여 연설한 내용 중[7]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윈저 왕조 제4대 국왕. 선왕은 제3대 국왕이자 아버지인 조지 6세이며, 다음 왕 자리는 제5대 국왕이자 장남인 찰스 3세에게 계승되었다.

25세이던 1952년 2월 6일부터 2022년 9월 8일까지 70년 214일간 재위한 군주로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며, 특히 여왕으로서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 영국에서의 호칭

요크의 엘리자베스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Elizabeth of York (1926년 4월 21일 ~ 1936년 12월 11일)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11월 20일)[16] 에든버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Duchess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2년 2월 6일) 여왕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952년 2월 6일 ~ 2022년 9월 8일) 왕위 계승 직후

여왕인 모든 나라에서 썼던 과거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라틴어: Elizabeth II, Dei Gratia Magnae Britanniae, Hiberniae et terrarum transmarinarum quae in ditione sunt Britannica Regina, Fidei Defensor) 그리고 다른 여러 칭호들을 한데 다 통합해서 부르는 비공식 칭호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건 다음과 같다.

다만 정식 칭호는 아님에 주의. '하느님의 은총으로 대 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전) 에든버러 공작부인, (전) 메리 오네스 백작부인, (전) 그리니치 남작부인, [19]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 가장 영예로운 가터 훈장의 군주, 가장 영예로운 바스 훈장의 군주, 최고(古)이며 가장 고귀한 시슬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성 패트릭 훈장의 군주, 가장 기품 있는 성 미카엘 훈장과 성 조지 훈장의 군주,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훈장의 군주, 무공 훈장의 군주, 제국 공로 훈장의 군주, 최고위 인도성 훈장의 군주, 가장 저명한 인도 제국 훈장의 군주, 영국령 인도 훈장의 군주, 인도 공로 훈장의 군주, 버마 훈장의 군주, 빅토리아&알버트 왕실 훈장의 군주, 에드워드 8세 왕가 훈장의 군주, 공로 훈장의 군주, 명예 훈위 훈장의 군주, 왕립 빅토리아 훈장의 군주, 가장 유서 깊은 예루살렘의 성 조지 병원 훈장의 군주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Queen, Defender of the Faith, Duchess of Edinburgh, Countess of Merioneth, Baroness Greenwich, Duke of Lancaster, Lord of Mann, Duke of Normandy,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Imperial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Burm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Edward VII,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Sovereign of the Most Venerable Order of the Hospital of St John of Jerusalem)' 그런데 공식 칭호는 1953년 대관식을 맞으면서 그녀가 여왕으로 있는 나라마다 각각 칭호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경우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20]과 그 밖의 국가와 영토[21]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22],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칭호 및 쓰지 않는 과거의 칭호들은 영어 위키백과에 있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1953년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국가원수로 있는 국가들은 각각 별도의 칭호를 제정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영국의 칭호와 형태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즉위 이후에 영연방 국가들이 새로 사용할 훈장을 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단장으로서의 칭호가 덧붙여졌다. '캐나다 기사단장, 오스트레일리아 기사단장, 뉴질랜드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기사단장, 파푸아 뉴기니 밸러 기사단장, 캐나다 무공 기사단장, 캐나다 경찰 메리트 기사단장, 뉴질랜드 여왕 공로 기사단장, 뉴질랜드 메리트 기사단장, 바베이도스 성 앤드루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로거후 기사단장, 파푸아뉴기니 멜라네시아의 별 기사단장(Sovereign of the Order of Canada, Sovereign of the Order of Australia, Sovereign of the Order of New Zealand, Sovereign of the Order of Barbados, Sovereign of the Order of Valour, Sovereign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Merit of the Police Forces, Sovereig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New Zealand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Order of St. Andrew, Sovereign of the Order of Logohu, Sovereign of the Order of the Star of Melanesia)' 영국 왕립 해군의 사령 장관, 노르망디 공작[23], 랭커스터 공작, [24] 맨 섬의 영주[25]이다.

한때 피지의 대추장(Paramount Chief)이었던 적도 있다. 더불어 영연방의 수장(Head of the Commonwealth)이라는 명예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부왕인 조지 6세 재위 기간 중에 영연방에 영국 왕이 국가원수가 아닌 나라도 회원이 될 수 있게 바뀌었고, 그래서 '왕'과 별개로 '영연방의 수장'이라는 직함을 추가했는데, 이후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직위도 이어받았다. [26] 영국 언론에서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라는 그녀의 긴 이름을 직접 칭하는 일이 드물고, Her majesty나 Queen 등으로만 칭한다. 서양에서는 이게 왕에 대한 경칭이다.

호칭 논란[편집] 즉위 초 엘리자베스 2세라는 호칭에 대해 스코틀랜드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인 이유는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기 때문인데 엘리자베스 1세 시기는 아직 연합왕국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입장에선 당연히 엘리자베스 2 세지만 스코틀랜드 입장에선 그냥 엘리자베스였다. 나라에 따라 관행에 차이가 있지만 영국(스코틀랜드 포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경우 1세는 나중에 2세가 등장하면 '~세'를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만약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의 이름을 따로 쓸 경우 엘리자베스 1세라고 적기보다는 그냥 엘리자베스라고 적게 된다.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여왕도 그냥 빅토리아라고 하지 빅토리아 1세라고 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빅토리아 2세란 여왕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동일 군주가 여러 칭호를 사용하면서 넘버링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모두 합창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1세라는 표기를 쓸 수 있다. 이 경우 엘리자베스 2세 겸 1세(Elizabeth II and I)라고 쓰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별개의 국가인데 국왕만 같았던(동군연합) 시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을 구분했었다. [28] 영국 정부와 왕실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잉글랜드나 그 이외 지역과 다른 문장(royal coat of arms)과 다른 모토(royal motto)를 사용하고, 왕관을 그릴 때도 잉글랜드의 성 에드워드 왕관 대신 스코틀랜드 왕관을 그리며, 왕세자의 대표 칭호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 대신 로스시 공작(Duke of Rothesay)을 사용한다.

비록 잉글랜드의 상징들이 대표로 쓰이더라도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스코틀랜드만의 상징들을 쓰게 하여 스코틀랜드만의 오랜 전통을 유지해 온 것이다. 하지만 왕의 이름에 붙는 넘버링의 경우 스코틀랜드만의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윌리엄 4세 시대부터 잉글랜드의 넘버링으로 강제 통일당하니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로서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2세라는 이름에 격분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 2세를 부정하며 무려 1707년 연합왕국 결성 당시의 연합 법까지 들먹이며 법원에 소송까지 냈으나 법원은 국왕 명칭 결정은 국왕 특권으로 소송을 기각하여 법적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코틀랜드에서의 반발은 계속되어, 공보물이나 공공시설물에 표기된 엘리자베스 2세 표기에서 2세 부분을 훼손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29] 한편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당시의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30]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넘버링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을 채택할 것인지 타협책을 제시했다. 향후의 국왕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각각의 기준으로 ~세 부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둘 중 숫자가 높은 쪽을 선택하게끔 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냥 잉글랜드의 넘버링을 따르고 스코틀랜드의 것은 무시했던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의 넘버링까지 합리화되었다.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8세 역시 잉글랜드 쪽의 숫자가 크기 때문이다. [31] 나머지 역대 영국 국왕들은 잉글랜드를 기준으로 하든 스코틀랜드로 기준으로 하든 넘버링이 우연히 일치하거나 [32] 양국 간에 동군연합이 성립(1603년)되기 이전에 양국에서 따로 모시던 군주들이므로 문제 되지 않는다. [33] 타협책도 나온 데다가 무한정 이 문제만 붙잡고 있을 순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스코틀랜드 인들의 반발은 일단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수시로 엘리자베스 2세를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냥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는 한다.

더불어서 여왕을 부르는 폐하에 해당하는 용어가 현재는 Your Majesty(2인칭)과 Her(남자일 때는 His) Majesty(3인칭)라고 하고 있는데 이건 헨리 8세 때 확립된 잉글랜드의 관습이고 [34], 스코틀랜드는 줄곧 Your/His/Her Grace라고 했으므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관습대로 Your/Her Grace라고 불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35] 물론 왕실은 계속 그 요구에 대해 계속 답을 하지 않고 기존 관례를 쓰고 있다. 2014년에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가 가결됐으면 다시 이 이야기가 거론되었을 것이다. 투표에서 찬성(스코틀랜드 독립)이 다수로 결정되면 엘리자베스 2세를 여왕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서 독립할 예정이었다. 정말 독립하게 됐으면 엘리자베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별도의 호칭을 쓰게 될 테니까 스코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이 부결돼서 그 문제는 따로 논의되지 않았다. 향후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세손이 즉위할 경우 다시 이 넘버링 시비가 붙을 가능성이 있다. [36] 아마 윌리엄 왕자는 윌리엄 5세[37]로 즉위할 텐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4세가 되어야 한다고 항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병합된 지 오래라 왕의 호칭에서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잉글랜드 왕세자의 칭호로 쓰인다.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 왕의 칭호도 같이 썼으나 아일랜드만의 넘버링은 따로 없었다. 스코틀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잉글랜드와 동군연합이 되었기에 넘버링을 따로 썼으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국외에 따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 가까웠기 때문에 잉글랜드 넘버링을 그대로 쓴 것이다. 한때 영국과 동군연합이었던 하노버는 그 지역이 과거에 지배 가문이 이리저리 자주 바뀌었던 탓에 넘버링을 따지기가 힘들어 그냥 영국의 넘버링을 똑같이 썼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에서 독립해서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는 나라들은 영국에서 쓰는 넘버링을 그대로 쓴다. 결국 영국 왕의 넘버링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불일치만이 문제가 되고, 다른 곳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어린 시절 1926년 4월 21일 오전 2시 40분, 런던에 위치한 외가 메이페어에서 조지 5세의 차남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2녀 중 맏이이자 장녀로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엘리자베스와 저에게, 우리의 어린 딸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실 겁니다. 저희 부부는 우리의 행복을 완성시켜줄 아이를 계속 기다려 왔었고,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정말 신비롭고도 환상적인 기분이 듭니다. 1926년 4월 22일, 요크 공작이 어머니 테크의 메리에게 보낸 편지. 태어났을 당시 조지 5세의 첫 손주이자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 아버지 요크 공작의 뒤를 이어 계승 서열 3위였던 만큼 그녀의 탄생은 대중에게 화제가 되어 많은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일개 왕자의 딸인 방계 왕족이었던 데다, 미혼이긴 했지만 큰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5월 29일, 생후 1개월에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라는 이름으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으로부터, 알렉산드라와 메리는 각각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47]와 할머니 테크의 메리의 이름으로부터 따왔다. 원래 아버지 앨버트 왕자가 할아버지 조지 5세에게 "아이의 이름을 빅토리아로 지어야 합니까?"라고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원하는 대로 하라"는 조지 5세의 뜻에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런던 하이드파크 코너에 위치한 자택과 리치먼드 파크의 화이트 로드지, 윈저 성, 밸모럴 성, 샌드링엄 하우스, 글래미스 성을 비롯한 외갓집 등을 오가면서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 및 주변인들에게 주로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자신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를 발음하기 어려워해 본인 스스로 릴리벳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훗날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인 해리 왕자가 2021년에 딸을 낳자, 증조할머니의 애칭을 따서 릴리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릴리벳 마운트배튼 윈저). 1930년, 어머니 엘리자베스 공작부인, 여동생 마거릿 공주와 함께. 4살이 되던 1930년에 여동생 마거릿 공주가 태어나면서 언니가 되었다. 당시 학교를 다니는 상류층 여식들이 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여동생 마거릿과 함께 어머니와 가정교사 메리언 크로포드'[48]에게 교육을 받았다.

크로포드는 "매우 예쁘지만, 고집 세고 영악하다"라고 그녀를 묘사했다. 수업은 주로 역사와 언어, 문학, 음악 위주였다. 크로포트가 저술한 책인 에서 엘리자베스는 말[49]과 개를 좋아했으며, 질서 있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었다고 묘사됐다. 엘리자베스의 주변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2살 때의 그녀를 지켜본 윈스턴 처칠은 아내에게 "어린아이가 놀라운 권위를 가졌고 생각이 깊다"라고, 이종사촌인 마거릿 로즈(Margaret Rhodes)는 "즐거운 어린 소녀이지만 근본적으로 분별 있고 예의 바르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3년 어느 날, 엘리자베스가 여동생 마거릿에게 자신 있는 말투로 "나는 3이고 너는 4야."라는 말을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마거릿은 "아니야, 나는 3이고 언니는 7이야!"라고 반문했는데, 한참 뒤에서야 언니가 말했던 숫자가 자신들의 나이가 아닌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계승 서열은 3위, 마거릿은 4위였다. 1936년 조지 5세가 사망하여 에드워드 왕세자가 즉위하였으나 그해 말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남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어 이전보다 더더욱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정 상속인이라 왕세녀에 해당하는 Princess of Wales(웨일스 여공) 작위를 받은 적이 없지만 [50] 실질적인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만약 조지 6세가 아들을 낳았더라면 계승 서열이 밀려 여왕이 되지 못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1]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가 두 공주를 모두 제왕절개로 낳아서 더 이상 출산하기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52] 그 후 이튼 칼리지의 부총장 헨리 머튼으로부터 헌법사를 배웠고, 프랑스어는 원어민 가정교사를 통해 배웠다. 전쟁 기간이던 1940년에는 안전을 위해 윈저 성에서 시간을 보냈다. 결혼과 가정. 엘리자베스는 1934년에 숙부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의 결혼식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56]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37년에 다시 만났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친손자로 [57] 두 사람은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먼 친척이기도 하다. 이후 1939년에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했는데, 13세이던 엘리자베스 공주는 당시 18세이던 필리포스 왕자에게 반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러 갔었으나, 1947년, 공주가 21세 생일을 맞을 때까지 기다리는 조건으로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리고 1947년 7월 9일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녀의 약혼은 몇몇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필리포스 왕자는 사실상 망국의 왕자로 [58] 지지해 줄 재정적인 기반도 없었고, 그의 누나들은 나치당원과 결혼하였는데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나치 및 독일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다. [59] 실제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은 필리포스와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특히 필리포스가 독일 혈통[60]인 걸 항상 의심했으며 그를 독일 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61]. 결혼 전 필리포스는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직위와 계승권을 포기하고 이름도 영어식인 필립으로 바꾸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하여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하면서 상기된 논란거리를 정리했다. 이후 필립 마운트배튼은 장인어른 조지 6세에게 에든버러 공작, 메리 오네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독 감정이 심했던 상황이었던지라 필립 공의 누나들은 아무도 참석할 수 없었다. [62]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공의 결혼식 정보 결혼 후, 1년 만인 1948년에 첫 자식이자 후계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손을 낳았고, 2년 뒤인 1950년에는 둘째이자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를 낳았다. 둘째 앤 공주를 낳은 지 10년 만인 1960년에 차남이자 셋째인 앤드루 왕자를 낳았다.

앤드루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 이후로 국왕이 즉위한 상태에서 태어난 자녀이기도 하다. 셋째를 낳은 지 4년 후에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했다. 국왕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져 가자, 1951년 11월 14일에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가 섭정으로 임명되어 1952년 1월, 영연방 순방을 떠났다. 그러나 케냐를 방문 중이던 1952년 2월 6일, 아버지 조지 6세가 암투병 도중 사망해 추정 상속인이었던 공주가 해외에 나간 상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묵었던 트리탑 호텔(Treetop Hotel)[64]은 유명한 관광지이다. [65]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아서 전설적 사냥꾼이자 자연보호 운동가 짐 코벳 영국군 대령이 밤새 잠도 안 자고 경호를 서준 것도 유명한 일화. 부부는 이 소식을 트리탑 호텔에서 사가나 로지(Sagana Lodge)로 이동했을 때 전해 들었다.

여왕에게는 남편인 필립이 수행원들을 물리치고 직접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엘리자베스는 영국과 영연방 전방에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출국할 때 공주였던 그녀는 여왕 신분으로 귀국했다. 암흑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을 잇는 새로운 젊은 여왕의 시대가 열리자 여왕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며 "동화 속 여왕"으로 묘사되었다. 관습대로라면, 여왕이 즉위할 때는 부군의 가문으로 왕조명이 바뀌었었기 때문에 윈저 왕조의 왕가가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 메리 대왕대비가 왕조명을 정할 당시의 합의사항으로 인해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로 고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여왕은 1952년 4월 2일에 "왕조명은 윈저로 계속한다"라고 발표했다. 1953년, 7개월간 여왕 부부는 영연방 포함 13개국을 순방했다. 처음 방문한 나라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투어 기간 동안 군중의 수는 엄청났는데, 호주 인구의 3/4 정도가 몰려든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6월 2일, 3달 전 메리 대왕대비가 사망했음에도 그녀의 뜻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4개월 동안 준비해 온 대관식이 지체되지 않고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대관식은 유럽 왕실 최초로 TV로 중계된 대관식으로, 당시 대관식의 TV 중계에 대해서 영국 내각 내에서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중에서도 윈스턴 처칠은 이에 반대했지만, 여왕은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최초로 TV로 중계되는 세계적인 주요 행사였다. 많은 가정집이 여왕의 대관식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했다. [67] 중계 당시 전 세계 시청자는 2억 7,7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68] 대관식에서 여왕이 쓰고 있는 왕관은 영국의 공식 왕관인 성 에드워드 왕관이다. 무게가 2.2kg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워 여왕은 "목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라며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 당시를 회고했다. 대관식 후 런던을 드라이브했고,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를 방문했다.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되어 근대 정치가 다 잡힌 상태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정치권력은 전무함에 가깝다.

게다가 본인도 이 점을 생각해서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 한마디 하지 않아 현대 왕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심지어 1965년에 거행된 윈스턴 처칠의 국장 이외에는 50년 가까이 영국 총리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다가, 2013년에 거행된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에 오래간만에 참석하기도 할 정도. 그래서 그런지 영국인들의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공개적인 정치 불화가 없는 선에서는 국정에도 일부 관여하고 있어, 실은 영국을 움직이는 흑막이 아닐까 싶은 모습도 보여주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각 불신임으로 인해 총리가 사퇴했을 때 국왕의 특권으로 총리를 2번 임명한 경력이 있고,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판에 탈퇴파들이 뒤집기에 성공하도록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69] 이처럼 정치에 일부 개입하는가 하면, 전쟁 등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여왕의 승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물론 여왕이 이를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긴 했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마가렛 대처의 포틀랜드 전쟁 개전선언인 아르헨티나 선전포고 결의안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고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불만 의사를 표현한 적이 있다. "부적절하다"고 했으면 거부권 행사인데, 당시 영국 여론이 전쟁 여론으로 기울어졌던 상황이라 포클랜드 전쟁을 막지는 않는 선에서 불만 의사를 표시했다. 2021년 2월 더 가디언지가 여왕의 동의권(Queen's Consent)에 관한 보도를 내놓았다. 동의권이란 국왕의 권한이나 사적 권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법안이 입안될 경우 국왕이 동의해야 비로소 의회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절차를 말한다.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을 여왕의 이름으로 승인해 법적 효력을 갖도록 하는 국왕 재가(Royal Assent)와는 다르다.

[70] 총리실 문서가 기밀 해제되면서 여왕 또는 찰스 왕세자가 동의권을 행사하여 1952년부터 1,063건의 법안을 입법 절차 전에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디언>의 주장은 여왕이 왕실과 관련이 없거나 적은 법안에 대해서도 사전에 검토하는 행위 그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1986년 연어 법[71]이나 2019년 주차 관련 법 등. 그리고 이 중 최소 4건의 법안은 왕실 측이 불만을 표시하여 수정되었다. [72] 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신재생에너지 사용 촉진법을 사전에 검토하여 신재생에너지 사용 의무에서 국가원수를 면제하는 조항을 추가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찰스와 윌리엄 왕세손이 탄소배출 절감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여왕이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왕실 측 대변인은 "여왕은 한 번도 동의 거부를 통해 법안을 거부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또 "동의권 행사 여부는 여왕의 요청이 아닌 의회의 결정으로, 해당 정부 부처가 왕실에 의견을 묻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표면과 달리,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영국은 전 세계 역사상 통치 전략이 가장 교묘하게 뛰어난 국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조항이 아닌, 영국인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 영국인들은 귀족과 평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신분제를 인정하고,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무를 이행한다면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자격이 있기에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주의인 것이다. 이런 개념 탓과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핏줄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여전히 영국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과 별개로 초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73] 또한 영국 총리들의 중요한 정치적 업무 중 하나가 바로 여왕을 알현하여 보고서를 올리는 것인데, 이 역시도 에피소드가 많다. 첫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친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시가를 피우면서 대담하는가 하면, 마거릿 대처가 왔을 때는 대처가 자신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15분쯤 기다리게 했다. 포틀랜드 전쟁 때 마거릿 대처의 전쟁 준비 안을 승인한 뒤에 "내 아들이 이번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그녀(대처 총리)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 야사 같은 이야기지만,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 등 정책 전반이 내키지가 않아 아침마다 "오늘은 그녀가 얼마나 내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는가?"[74]라고 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도 미운 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대처의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 자격으로 참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처음으로 여왕을 알현했을 때 "총리직을 맡게 된 걸 축하하오. 과인은 12명의 영국 총리를 만났소만."이라고 말해 캐머런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상술한 여군부대에 입대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대하지 않아 여왕이 격노하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에서 죽어나간 건 미군과 영국군이었다.

당시 국가원수 중 유일한 참전용사이자 영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결례. 비난받는 가운데에도 사르코지는 정신 못 차리고 "여왕이 오는 건 환영하지만, 노르망디 기념식은 전통적으로 미국-프랑스 간의 행사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욱 어그로를 끌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중재해서 어쩠지 넘어가긴 했지만,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장남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일단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집권기인 2014년의 D-Day 70주년 기념식에서는 참석했다. 2019년 75주년 기념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영국-프랑스 간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눠서 시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프랑스 쪽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영국 쪽 행사에만 참석했다. 영국쪽 행사 프랑스 쪽 행사 이후 1992년에 발생한 윈저성 대화재의 복구사업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 추산되어 국민들의 반발이 있자 스스로 왕실이 가진 면세 특권을 포기했다. 때문에 그 이후로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계속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다.

왕권신수설이 횡행하던 시대나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던 무렵과 이것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인 셈이다. 즉, '같은 국민이지만 직업이 왕인 것'이라고 직접 인정한 것이다. [75] 그러나 2017년 11월 여왕이 본인 사유 재산을 관리하는 랭커스터 공국을 통해서 일부 자산을 조세피난처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폭로로 밝혀지자, 그녀의 대인배라는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말았다. 랭커스터 공국은 "두 피난처 모두 영국의 해외 영토며 투자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맏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여왕을 비난하는 여론이 종종 나왔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대응하자 급기야는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까지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76] 1999년 영연방 왕국의 일원이자 영연방 주요 회원국인 호주에서 여왕을 '호주의 군주'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헌법을 바꿔 공화정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 끝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54.87% vs 45.13%로, 과반수의 호주 국민들이 왕정 존속을 선택해 호주의 군주직을 유지하게 됐다. 당시 공화정 전환 운동의 지도자였던 맬컴 턴불은 이후 공화정 전환 운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여러 정치활동을 거쳐 2015년 결국 호주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호주 국민들의 여왕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에 총리 당선 이후 계속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압박에도 공화정 전환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여왕이 만약 가까운 시일 안에 타계할 경우 맬컴 턴불 총리가 호주 왕정 유지에 불안 요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 [77] 2022년 또 다른 공화주의자 앤서니 앨버니지가 총리가 되면서 또 모르게 되었다. [78] 또한 호주의 공화정 국민 투표의 여파가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등 다른 영연방 왕국들로 퍼졌다. 해당 국가들의 여론 조사 등을 봤을 때 여왕 사후 왕위 계승의 향방에 따라 영연방 왕국들의 군주제 폐지 여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

이와는 별도로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400년간 이어온 연합왕국의 왕관이 나의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가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시행하기로 합의하면서 여왕의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2014년 투표를 앞두고 영국 정가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해줄 테니까 제발 남아줘요"하며 읍소하고 있으며 여러 정치인들은 여왕에게 "폐하! 한마디라도 해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 문제는 스코틀랜드 인들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더 선>의 주장에 따르면 브렉시트 투표 직전 식사 자리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의 발언이 있었다고 하며, 탈퇴파에서 이를 막판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 여왕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국이 유럽의 일부여야만 하는 이유 3가지를 대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브렉시트를 두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에 언론 규제 단체인 IPSO는 "<더 선>의 기사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misleading)"고 발표했지만, <더 선>은 2명의 소식통을 통해서 "여왕이 당시 부총리였던 닉 클레그한테 말했다"라고 주장했다.### 닉 클레그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가 <더 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한 소식통 중 한 명이다"라고 지적했으나, 마이클 고브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닉 클레그는 "여왕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일개 부총리한테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 논평을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더 선>의 주장을 보증해주기를 거절했다. 영연방 수장을 찰스 왕세자에게 물려줬으면 하는 발언을 하였다.# 2018년 12월 29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밀리에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서 로비를 진행한 것이 밝혀졌다. 버킹엄 수석 비서는 내각에 보내는 편지에 "여왕은 새로운 요트를 구매하고 싶지만,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왕실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지금까지 다른 왕족들이면 몰라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편지의 폭로로, 여왕도 사사로운 이유로 내각에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2019년 1월 25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례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정치와 관련하여 의원들에게 합의점을 찾기를 촉구했다.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두 모여서 합의점을 찾읍시다"라고 의원들에게 부탁했다.# 일각에서는 "총리인 테레사 메이가 아니라 의원들에게 직접 말한 것은, 여왕이 총리와 내각을 더 이상 신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2일 브렉시트가 노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여왕과 왕족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계획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 내각 관계자는 "이 계획은 냉전 시기부터 있던 것으로, 노딜 브렉시트로 시민들의 소요사태가 일어나면 대비하기 위해서 다시 고려 중이다"라고 대답했다. 영국의 재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노딜로 갑자기 관세가 생기면 식약품을 수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이에 하드 브렉시트 지지자인 제이콥 리스-모그는 "내각이 노딜 브렉시트에 불필요하게 긴장한다. 영국 왕실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런던에 남아있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던 중 독일 슈피겔이 1988년 11월 이임 인사를 하러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난 뤼디거 베히 마어 주영 독일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의 요약에서 “영국의 미래는 유럽에 달렸다”라고 했다는 내용의 외교전문이 공개됐다.#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가 생전에 물러나고 그의 장남인 황태자 나루히토가 즉위하면서, 영국 내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양위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여왕 본인이나 왕실 및 정치권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아직 없다. 2019년 8월 11일 영국 일간 타임스에서 여왕이 브렉시트 문제로 혼돈을 겪고 있는 영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해 현 집권 세력에 대해 "inability to govern(제대로 통치를 못 한다, 통치 능력이 없다)"며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고 보도했다. 기사 1 기사 2 2019년 9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별장인 밸모럴 성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성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장난을 쳤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왕을 몰라본 관광객들이 "이곳에 사시냐"라고 질문하자 엘리자베스는 "인근에 집이 있다"라고 대답하고, "여왕을 만나본 적이 있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라고 답하고 옆에 있던 수행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여왕을 만나 본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끝까지 여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관광객들을 속인 것이다. (서울신문 기사) 2020년 1월에 해리 왕자의 독립과 관련해서 왕실 고위직 회의를 가졌으며, 독립을 승인하였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영국에서도 확진자 4만여 명, 사망자 4천여 명이 넘어가고 보건장관, 보건차관이 감염되고 보리스 존슨 총리마저 감염되어 자가격리를 하던 중 입원하게 되면서 리더십에 큰 공백이 생기자 여왕이 직접 나섰다. 4월 5일,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한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여왕은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일선 의료진들을 칭찬하고 국민들을 격려했다.# 2020년 6월 25일에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서 다른 참전국 국가원수들과 함께 추념 메시지를 보냈다. 다만 영상으로 직접 출연한 다른 국가원수들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출연하지 않고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가 메시지를 대독 했다.

메시지 전문 2020년 10월 15일. 7개월 만에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외출하였는데, 노 마스크라서 논란이 나왔다.# 하지만 다시 코로나19가 퍼지자 원저 성으로 들어갔다. # 2021년 4월 9일, 70년 넘게 해로한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하였다.# 왕실 성명에 따르면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당분간 윈저 성에 남아있겠다고 밝혔다. 2020년에도 코로나 때문에 윈저 성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일각에선 여왕의 처소가 윈저 성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81] 그리고 2022년 3월 6일, 여왕은 "앞으로 버킹엄 궁전을 떠나 남은 여생을 윈저 성에서 보낼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22년 2월 6일 즉위 70주년을 맞았다.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등 조촐한 기념행사를 했다.

여왕의 70주년(플래티넘 주빌리) 공식 기념행사는 6월 2~5일 연휴에 대대적으로 개최된다. 거리 파티, 군 퍼레이드, 팝 콘서트 등 다양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다만 여왕은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고, 참여하지 못한 행사에서는 대신 영상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영상 2022년 9월 6일 리즈 트러스가 여왕이 머물고 있는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으로 향해 신임 영국 총리로서 알현하였는데, 이 모습이 대중에게 공개된 여왕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5.5. 건강 이상설[편집] 2020년대에 들어서자 고령인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로 여왕의 대외 활동이 이전에 비해서 눈에 띄게 줄어들고, 2021년 4월,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사망하면서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1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10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에 검은색 지팡이를 짚고 참석했다.# 2004년 무릎 수술 이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지팡이를 사용한 것이다. 왕실 측에서는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고, 단순히 편의를 위한 조치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20일 예정되어 있던 북아일랜드 방문을 취소한데 이어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 알려지면서 건강이상설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버킹엄 궁 측에서는 "'공무를 취소하고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들의 반강제적 권고를 수용한 것이며, 병원 입원은 간단한 검사를 받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히며 건강 이상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며, 코로나 19와 관련된 사안은 아니라고 한다.# 이후 26일, 윈저성에서 김건 주영 한국대사를 접견하는 등 공식 일정을 재개했다.# CNN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3주간 1,000km의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 심각한 건강 이상일 가능성은 낮다."라고 분석했다.# 26일, 버킹엄궁은 여왕이 입원 이후 첫 외부 일정으로 예정되어 있던 제26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는 의사들의 휴식 권고에 따른 것이며, 영상 메시지 형태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여왕이 빡빡한 개인 일정과 늦은 시간에 텔레비전을 자주 시청하여 신경이 쇠약해졌다"라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여왕은 4월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사별한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들을 불러 계속 점심, 저녁을 같이 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을 키워준 동갑내기 유모 마벨 앤더슨과 함께 자주, 밤늦게까지 TV를 시청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미국 NBC의 보도에 따르면, 의사들은 여왕이 건강에 집중할 시간을 갖도록 스케줄을 조정할 것과 저녁 일과시간을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더불어 여왕이 밤마다 마시는 칵테일도 포기하라고 조언했으며, 신체에 무리가 가는 장시간 산책도 멈추라고 했다고 한다.

영국 ITV는 "왕실이 여왕의 의무보다 건강을 더 우선시하기 시작했다"라고 분석했다.# 즉,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 관리를 위해 외부 일정을 더 줄여나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 계승 순위인 맏아들 찰스 왕세자의 공무가 이전보다 더 늘어나거나 아예 섭정을 맡길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국 왕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건강 이상설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필립공과 함께 코로나 19 백신을 접종한 여왕은 평소 머물던 윈저성이 코로나19로 폐쇄됨에 따라 건강 상태를 알 수 없었다는 내용도 보도되었으며, 지난해 1월 여왕이 매해 방문하던 샌드링엄 여성 연구소를 '사소한 감기'를 이유로 가지 못한 것도 건강 이상 징후였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더불어 왕실에서 독립해 미국에서 거주 중인 손자 해리 왕자가 여왕을 걱정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면서 [83], 여왕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의혹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후 런던 근교 윈저성에서 여왕이 직접 재규어 차량을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건강 이상설은 현재로서는 사실무근이거나 적어도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한 왕실 전문가는 여왕이 올해 직접 '최악의 해'라고 칭했던 1992년 이후[84] 재위 중 가장 최악의 한 해[85]를 보냈으며, 이것이 여왕에게 건강상의 문제를 끼쳤을지는 불분명하지만, 큰 정신적인 상처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이후 11월 14일, COP26 불참 이후 첫 공식 외부 일정이었던 현충일 감사 성찬례마저 허리 부상을 이유로 불참했다.# 그러나 여왕은 사흘 뒤인 11월 17일 런던 근교 윈저성에서 퇴임을 앞두고 있는 닉 카터 국방 참모총장을 만났는데 지팡이도 짚지 않은 채 허리를 곧게 세우며 건강한 모습으로 카터 총장을 맞이함으로써 건강 이상설을 불식시켰다. # 또한 12월 23일(현지 시간) 녹화한 크리스마스 담화에서 필립 공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며 평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약 8분 간의 연설을 이어가며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했다.

2022년 2월, 맏아들 찰스 왕세자가 코로나19에 재감염되었다. 찰스 왕세자가 여왕을 만난 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양성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여왕의 감염 여부를 놓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히 여왕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며칠 후 맏며느리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아 곧바로 격리에 들어갔다. 카밀라는 찰스 왕세자와 밀접 접촉자였지만, 이미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모두 마친 데다가 음성 판정을 받은 상태라서 자가 격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기 전까지 대외 활동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카밀라가 여왕을 만났는지에 대한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버킹엄 궁전에서 여왕이 '의료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밝히면서 여왕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는지, 검사를 받았다면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평을 거부했다.

데일리 메일 보도 이후 여왕은 화상 접견 등 일부 비대면 업무를 재개했으나, 버킹엄 궁전에서는 여전히 여왕의 코로나19 감염 여부와 자가격리 조치 여부에 대해서 논평을 거부했다고 한다. [86] 2021년 10월, 북아일랜드 순방이 취소된 이후 여왕은 대면 업무와 순방[87] 등을 자제하고, 비대면 업무만을 수행 중이었으며, 버킹엄궁에서는 여왕의 대외 업무 복귀를 계획 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여왕의 대외업무 복귀는 당분간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2022년 2월 20일, 버킹엄 궁에서 "여왕이 코로나에 확진되었으며, 가벼운 감기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 여기에 대해 왕실 전기 작가인 로버트 잡슨은 '가벼운 감기'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여왕의 상태가 위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여왕 스스로도 가벼운 왕실 업무를 이어나간다는 것을 보면, 건강에 크게 이상이 있거나 무리가 갈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약 여왕의 상태가 위중했다면 '여왕이 COVID-19에 감염되었다'라고만 버킹엄 궁이 밝혔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왕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인해 예정되었던 화상 접견 일정이 취소되었다.# 전문가들은 여왕이 코로나19 진단을 받은 후 "평소보다 나약해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우려했다. BBC 기자 다니엘라 랄프는 "궁의 분위기는 조심스럽지만 경계심이 없다"라며 "여왕은 95세의 나이로, 작은 감염에도 매우 취약한 고령이며, [88] 또한 지금 여왕은 1년 전보다 훨씬 더 날씬하고 허약해졌다. [89] 여왕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2022년 2월 28일, 여왕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며 가족과 함께 프로그 모어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보도되었다.

코로나19에 걸렸다가 얼마 안 가 완치되는 등 나이에 비해서 여전히 건강한 편이지만, 최근 들어서 예전에 비해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왕실 측 관계자는 "여왕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하고, 능력 있고, 관심이 있지만, 육체적으로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3월 22일, 여왕이 오랜 시간 동안 서 있거나 걷기 극도로 어렵다며, 곧 휠체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 다만 필립 공의 사망 이후 약 1년 만에 진행되는 첫 추도식(3월 29일)에는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5월 10일에 예정된 영국 의회 개회식에 여왕이 건강문제로 참석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찰스 왕세자가 대신 참석하는 안이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여왕이 재위 기간 중 의회 연설에 불참한 적은 1959년과 1963년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를 임신 중이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여왕의 참석 의사가 강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여왕이 정상적으로 참석할 가능성이 크다. 여왕의 건강 악화로 인한 이동 불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62,000파운드를 들여 윈저성 경내에 첨단 이동 장치를 설치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2022년 4월 14일, 매년 부활절을 기념해 열리는 마운디 서비스 행사에 여왕이 불참했고,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 내외가 대신 참석했다. 여왕이 이 행사에 불참한 것은 1970년 이후 처음이며, 즉위 이후 단 4번밖에 없었다. 왕실 전문가 로버트 잡슨은 "여왕이 Zoom 국왕이 될 수 없다"며, "찰스 왕세자에게 정식으로 섭정을 맡겨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90]# 2022년 5월 4일, 버킹엄 궁에서 "올해 여왕은 버킹엄 궁 가든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여왕이 가든파티에 불참하는 것 역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2022년 5월 9일, 버킹엄 궁은 "여왕이 5월 10일에 열리는 의회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것을 포기했다"라고 발표했다. 여왕은 참석하기를 희망했으나 주치의들의 권고로 결국 참석하지 않기로 하면서, 개회식에는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세손이 참석하기로 했다.# 의회 연설은 찰스 왕세자가 대독 했는데, 이는 왕세자가 된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여왕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2022년 5월 15일, '플래티넘 주빌리'를 축하하는 로열 윈저 호스 쇼를 관람하며 1시간 넘게 야외에 머문 데 이어서, # 5월 17일에는 런던 패딩턴역에서 개최된 엘리자베스선[91] 개통식에 건강한 모습으로 막내아들과 함께 깜짝 등장했다.# 23일에는 골프용 카트를 타고 첼시 플라워쇼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개적인 야외행사를 재개하며 건강에 대한 우려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지팡이나 골프 카트를 사용하는 등 여전히 거동은 불편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6월 2일 플래티넘 주빌리 기념 퍼레이드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일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열리는 감사 성찬례에는 불참한다고 한다.# 2022년 9월 7일, 버킹엄 궁 측은 "전날 여왕은 공식 일정을 소화했으나, 주치의들에게 휴식을 권고받았다"며 "당일 예정돼있던 추밀원 회의 일정은 다음 주 수요일로 변경되었다"라고 밝혔다.# 2022년 9월 8일, 여왕의 주치의들이 건강상태가 우려되어 의료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찰스 왕세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윌리엄 왕세손[92]이 소식을 듣고 여왕을 찾아갔다. 앤 공주와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소피 리스 존스 또한 밸모럴 성에 모였으며, 왕실 고위직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해리 왕자 또한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졌다.[93] # 또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참석차 이탈리아에 머무르던 사라 퍼거슨이 베니스를 출국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94] 영국 BBC의 의료 편집자 퍼거스 월시(Fergus Walsh)는 일찍이 버킹엄 궁이 공개한 성명에서 핵심 문구는 "의사들은 우려하였다"라며 그는 또한 왕족들의 (여왕이 여름 동안 머물고 있는) 밸모럴 도착의 중대성을 강조하였다. 최근까지 그녀는 상대적으로 정정하였다고 그는 설명하였다. 

영국 서민원에서 에너지 가격과 예산에 대한 토론에서 수상의 발언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민원 의장 린지 포일 경에 의해 회의장에 여왕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이 전해졌는데 이 공지 뒤에 서민원 의원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우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고 BBC 정치부 편집자 크리스 메이슨(Chris Mason)이 전했다. # BBC의 전직 왕실 기자가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실에서는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자신은 기동성 장애[95]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여왕의 연령을 생각해 보면 여러 건강상의 문제들이 얽혀있을 수 있다고 한다. # 현직 왕실 출입기자 니콜라스 위첼(Nicholas Witchell)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제기하였으며 왕실이 9월 8일에는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영국 BBC는 여왕의 건강에 대한 성명이 발표된 직후, 현지 시각으로 저녁 6시까지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뉴스특보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와 기자, 수어 통역사까지 모든 출연자들이 상복을 연상하게 하는 검은 옷과 넥타이를 입고 나왔다. # 영국의 공영방송이 여왕의 건강에 대한 특집 방송을 진행하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히 이례적이며, [96] 그만큼 영국 정부와 언론 측에서 해당 사안을 엄중히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왕의 건강 이상설이 전해진 직후,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이 취소되었다. 한때 즉위 60주년 되는 해인 2012년에 찰스 왕세자에게 양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여왕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한다. 전임 국왕이 사망해야 후임자에게 왕위가 승계되는 영국 왕실의 전통도 있거니와, 여왕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남동생 조지 6세에게 양위한 것이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받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흔을 넘었는데도 매우 건강한 데다 모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왕대비는 101세까지 장수했기에 찰스 왕세자의 즉위가 한참 멀어 보인다. 2016년 9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왕실 전기작가 휴고 비커스는 "같은 90살이었을 때의 엘리자베스 왕대비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 왕위 승계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2007년에는 똑같이 장수 중인 남편 필립 공과의 결혼 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영국 군주정 역사에서 가장 긴 결혼생활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1년 6월 10일에는 필립 공의 90세 생일이 있었다. 결혼 50주년과 60주년 때와는 달리, 2017년에 맞은 결혼 70주년은 가족과 친구만 참석하는 조촐한 축하 행사만 거행되었다. 이렇듯 장수하다 보니 여왕 즉위 후 거쳐간 영국 총리가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 흄,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까지 15명에 달하며, [132] 그중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먼저 태어난 총리는 8명이다. [133] 특히, 토니 블레어(여왕이 대관식을 한 1953년생)는 여왕의 재위 기간 중 태어나 총리가 된 첫 사례이고 이후 총리들 [134]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재위 중 만난 미국 대통령 역시 무려 13명#[135] 2012년 6월 4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여왕이 퇴위한다거나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를 건너뛰어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즉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밝혔다.# 한편, 여왕이 2013년 11월에 열리는 영연방 정상회의에 불참하고 찰스 왕세자 부부를 대신 보내기로 해 왕위 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971년의 첫 회의를 제외하면, 여왕이 영연방 정상회의에 불참한 적이 없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을 나오게 하는 데 한몫했었다. 정작 영국 대중들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 대신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왕위를 승계하길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2010년 12월에는 여왕의 첫 손주이자 앤 공주의 아들 피터 필립스의 부인 어텀 필립스가 '사반나 앤 캐슬린'을 출산해 첫 증손주를 보게 되며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이전에 버킹엄 궁전이 어텀의 임신을 발표할 때 '여왕은 자신이 첫 번째 증조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3년 7월에는 캐서린 왕세손비가 출산 예정일을 넘겼는데도 출산 소식이 없자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내가 휴가 떠날 23일 전에만 태어났으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공교롭게도 휴가 하루 전날인 7월 22일, 캐서린이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조지 왕자를 순산함에 따라 3대 뒤에 왕이 될 증손주까지 보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기록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 중인 1894년에 에드워드 8세가 태어난 이후 119년 만의 일이다. 2015년 5월 2일에는 캐서린 왕세손비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를 순산함에 따라, 외동딸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 이후 65년 만의 직계 공주도 보게 되었다. 고구려의 장수왕도 하도 오래 즉위한지라 (79년) 태자가 그보다 먼저 죽었다. 따라서 장수왕의 후계자인 문자명왕은 그의 손자였다. 2010년대에 들어와 바티칸, 네덜란드, 카타르, 벨기에, 스페인, 일본 등 세계 각지의 군주국에서 국왕(바티칸은 교황, 일본은 천황)이 후계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기에 엘리자베스 2세도 동일한 수순을 밟을지가 관심사지만 아직까지는 양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 92세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런던의 런던서 앨버트 홀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스팅과 톰 존스, 카일리 미노그,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 섀기 등 음악가들과 연극, 영화 스타들이 참여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콘서트가 끝난 뒤 아들 찰스 왕세자와 함께 무대에 섰다. 2020년에는 아랍 군주들 중 최장 재위 군주였던 오만의 카부스 빈 사이드 알 사이드와 최고령 군주였던 쿠웨이트의 사바흐 알 아흐마드 알자비르 알사바흐가 차례로 세상을 뜨면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짬을 견줄 만한 군주도 전부 사라졌다. 2021년 4월 9일에 본인보다 유일하게 나이가 많은 왕실의 생존 인물이었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도 타계하여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2012년 2월 6일부로 재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을 맞았는데 이는 고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1897년 이후 115년 만의 경사. 관련기사 여왕은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을 고려해 가급적 기념행사의 규모를 축소해서 낭비를 줄이려고 하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2012 런던 올림픽 개최와 맞물려 관광객을 대거 유치할 수 있는 호기로 보고 각종 행사를 준비했다. 2월 3일, 100만 그루 나무 심기 캠페인에 참석해 첫 번째 나무를 심는 것으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시작했다.

2월 6일은 60주년 당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부왕 조지 6세의 기일이기 때문에 행사가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노퍽 주의 소도시 킹스린과 샌드링엄 및 인근 학교를 방문한 여왕은 어린이와 시민들을 만나 축하를 받았으며, 즉위 60주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데 다시 헌신하겠다"라고 밝혔다. 런던 하이드 파크와 에든버러, 고스포트에서는 축포를 쏘았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여왕의 통치에 존경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월 8일,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여왕을 찍은 사진 1백 점이 4월 22일까지 전시된다. 2월 15일, 여왕과 필립 공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공관인 램버스 궁전에서 다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한 즉위 6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다.

3월 10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6월 본 행사를 앞두고 주빌리 투어 일정을 시작했다. 이 여행은 오는 7월까지 와이트 섬, 버밍엄, 머서티드빌, 에든버러 등을 거칠 예정이라 알려졌다. 남편과 손자며느리 캐서린 왕세손비를 대동한 여왕이 제일 먼저 방문한 도시는 레스 린으로, 이를 기념해 도시의 광장을 주빌리 스퀘어로 개칭하고 여왕이 참관한 가운데 명판 제막식을 가졌다. 여왕 일행은 드몽포르 대학에서 학생들이 연 패션쇼를 관람한 후 레스터 성당에서 열린 감사 성찬례에도 참석했다. 3월 20일, 의회를 방문해 재위 기간 동안의 감회를 밝히는 연설을 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영국적인 덕목으로 복원력, 창의력, 관용성 등을 예찬한 여왕은 영국군의 희생과 용기, 영연방 내 우호관계 증진 등을 강조했다. 이날 영국 의회는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의원들의 사비를 모아 1,500 조각의 유리로 왕실 문장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공개했다. 한편 왕세자와 콘월 공작부인이 주빌리 투어의 일환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순방하기 위해 이날 출국했다.

3월 23일, 영국/역사상 즉위 60주년을 맞은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2세뿐이며 영국 국회의사당 서쪽에 빅토리아 타워가 있는 만큼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엘리자베스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빅 벤을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3월 24일, 주빌리 투어로 맨체스터를 찾은 여왕 부부가 한 서민 커플의 결혼식에 깜짝 참석해 부부와 하객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왕실의 열렬한 팬이었던 존 캐닝이 버킹엄 궁전에 청첩장을 보냈지만 당연히 거절되었는데, 마침 그의 결혼식 날 주빌리투어 공식 일정으로 맨체스터를 방문한 여왕 부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결혼식장을 찾은 것. ## 4월 16일, 장녀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일간 방문했다.

4월 19일,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어린이 20만 명이 그린 자화상이 여왕의 초상화와 함께 버킹엄 궁전 정면에 3일간 영사된다. 4월 26일, 3남 에드워드 왕자가 주빌리 투어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여기서 에드워드 왕자는 고조부 에드워드 7세가 152년 전 왕세자 시절에 방미해 2그루의 나무를 기념식수했던 필라델피아 지라드 칼리지(Girard College)를 찾았다. 5월 2일, 차남 앤드루 왕자가 주빌리투어 일정으로 인도를 이틀간 방문했다. 5월 10일, 17개국에서 온 550 필의 말과 1,200명의 무용수들이 참가한 윈저 호스 쇼가 왕실의 성원 하에 13일까지 개최되었다. 여왕 부부가 참석한 폐막식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수잔 보일과 호주의 유명 연예인 롤프 해리스[138] 공연이 있었다. 5월 14일, 마담 투소 박물관이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새로 제작한 여왕과 필립 공의 밀랍 인형을 공개했다.

5월 17일, 1952년 즉위한 이래 현재까지의 여왕을 주제로 한 60점의 회화 작품이 선보이는 'The Queen: Art & Image'전이 영국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10월 21일까지 열리는데, 김동유 교수가 아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되었으며 다이애나비의 사진 1,106개로 여왕의 얼굴을 완성한 사진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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