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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목마

리베로수 2021. 6.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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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극으로 감상하는 트로이 전쟁…'일리아드' 한국 초연

 

김달중 연출, 배우 황석정·최재웅·김종구 출연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를 바탕으로 한 연극 '일리아드'가 오는 29일 대학로 예스 24 스테이지 2관에서 한국 초연의 막을 올린다.

 

작품은 미국 연출가인 리사 피터슨, 무대와 TV 프로그램 등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데니스 오헤어에 의해 희곡으로 탄생했다. 2010년 시애틀 레퍼토리씨어터에서 처음 선보인 후 8개국 17개 도시의 무대에 올랐다.

 

'일리아드'는 10년에 걸친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아킬레스와 헥토르 등 전사들과 그리스 신화 속 신들, 전쟁으로 목숨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단 한 명의 내레이터 역 배우에 의해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내레이터는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무대에서 때로는 전쟁의 주역, 때로는 전쟁의 증인이나 희생자가 되어 신과 영웅의 이야기, 전장의 세계를 독백으로 적나라하게 그린다.

 

 

개성 있는 연출력과 대중성을 갖춘 김달중이 연출을 맡았다.

내레이터 역은 배우 황석정·최재웅·김종구가 캐스팅돼 각기 다른 캐릭터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공연은 9월 5일까지.

 

트로이 전쟁


많은 역사가들은 트로이 전쟁을 호메로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한 사건이라고 간주했으나, 트로이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트로이의 존재가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정복하기 위해 거대한 목마 안에 병사들을 숨겨 침입하는 계략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전설로 남아있다.


서양세계에서 일찍이 인간의 갈등을 다룬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인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신들의 불화와 싸움을 함께 뒤섞어 이야기하는 이 전설 속에 과연 역사적 사실성이 어느 정도 담겨 있을까에 대해서 설들이 분분하다.

 

오랫동안 많은 역사가들은 트로이 전쟁을 기원전 850~800년경 호메로스가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당시 내려오던 전설과 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정리한 문학작품 속의 한 사건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근래에 고고학자들은 오늘날 터키 서쪽 다르다넬스 해안에서 9층으로 쌓인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하고, 그 가운데 여섯 번째 층이 그리스 군에게 기원전 약 1200년경에 파괴된 도시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에게 해와 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안의 관문을 점령하고 있는 트로이 성은 여러 차례 이민족의 침략을 받는 가운데 파괴되고 재건축되는 과정을 거듭했다. 유적지에서 마지막으로 형성된 층은 로마인들이 점령하여 세운 도시 일리 온으로 밝혀졌다.

그리스 인들과 트로이 인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다

 

트로이 성을 공격하기 전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호메로스는 신과 영웅들의 경쟁 및 불화로 돌리고 있다. 즉,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왕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파리스가 유혹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다면 그 실제 원인은 신들이 작용했다기보다는 다르다넬스 관문을 통과하여 흑해에서 교역을 시도하던 그리스인들이 그곳을 지키며 일종의 통과세를 요구하는 트로이 인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면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리스인들은 2년간 전쟁준비를 마치고 대함대로 군대를 트로이 해안에 상륙시켰다. 약 25,000명으로 추산되는 그리스 군은 상륙하자마자 진지를 보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스의 아킬레우스, 트로이 지휘관 헥토르를 쓰러뜨리다

 

트로이는 주위를 잘 통제할 수 있는 요새로서 성내에는 왕궁이 있고, 약 3천 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수비대가 있었다. 사방에 탑이 있어 접근하는 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높이 6m, 두께 4.5m의 성벽으로 보호되었다. 이 정도의 성벽만으로도 트로이 군은 그리스 군의 엉성한 공성 작전을 충분히 막아냈다.

 

그리스 군은 각 부족별로 조직을 가졌는데, 그것은 각 부족의 병력과 지휘관의 덕망에 따라 우열의 차가 심했다. 개개 병사들은 대부분 창으로 무장하고 지휘관은 전차(전투용 마차)를 보유했다.

 

전쟁은 결정적인 승패 없이 9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무렵 그리스군은 두 유명한 지휘관, 즉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휘관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지휘관이었던 아킬레우스가 가만있는 동안 그리스군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대한 감정을 풀고 싸움터에 나섰을 때 그리스군은 아킬레우스의 갑옷만 보고도 사기충천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지휘관 헥토르와 싸워 그를 쓰러뜨렸다.

트로이의 저항에 거대한 목마 속 병사를 숨기다

 

그러나 트로이는 바로 함락되지 않고 새로운 동맹자들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했다. 이때 동맹자 가운데는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도 끼어 있었다. 여하튼 트로이가 버티는 한 그리스군은 구태의연한 방법만으로는 트로이를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으로 오디세우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특별한 방법으로서 목마의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공성을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처럼 가장한 후, 일부가 인접한 섬 뒤에 숨어서 거대한 목마를 제작 했다. 그들은 그것을 불화의 여신 엘리스에게 선물로 제공할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사실은 그 속에 무장한 병사들을 숨겨놓았다. 목마는 20~50명의 병사를 채울 만큼 거대했다.

 

그리스, 목마의 계략으로 트로이를 완전히 정복하다

 

그리스 함대 대부분이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 몇 사람이 목마를 끌고 오자 트로이군 내에서는 그 목마를 어떻게 처리할까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호기심의 대상이 된 목마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리품으로 빨리 성 안으로 갖고 갈 것을 제의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며 경계했다. 라오콘이라는 신관이 나타나더니, 그리스 군은 간계에 능하니 목마 속에 있는 것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순간 시논이란 이름의 그리스군 포로가 끼어들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미워해 떨어뜨려 남게 된 자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목마는 여신의 비위를 맞추고 그리스 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것으로서, 거대하게 만든 이유는 성내로 운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트로이 성내로 들어가면 트로이 군이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트로이 군은 목마를 성내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고 일정한 의식을 밟았다. 온종일 잔치가 계속되고 노래와 환호 속에 의식이 치러졌다. 이윽고 밤이 되자 목마 속의 그리스 병사들은 간첩 시논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오고, 대기하던 우군에게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그리스군은 성내로 일제히 쳐들어갔다. 그들은 성내에 불을 지르고, 잔치 끝에 쓰러진 트로이군을 모두 죽이고 트로이를 완전히 정복했다.

 

트로이 전쟁, 많은 의문점을 안고 전설로 남다

 

트로이 전쟁 전설을 보면 의문 나는 점이 많다. 그러나 트로이가 존재했다가 망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망하게 된 데는 전설처럼 목마의 함정과 같은 일은 없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그와 같은 종류의 특별한 계략이 있었고, 트로이군은 거기에 쉽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트로이군은 왜 라오콘의 제의대로 목마를 뜯어보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우둔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사람은 곧잘 저지르곤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현명하지 않고, 때때로 우둔하고 방심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당시 성을 공격하는 기술상 획기적 변화, 즉 공성 장비를 개발하고 목마와 같은 거대한 충차를 제작하여 그것을 이용, 트로이 성문을 부수고 점령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일찍이 그리스인들이 그러한 공성장비를 사용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다. 호메로스 자신이 살았던 철기시대의 전쟁술에 대하여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청동기시대의 트로이 전쟁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고, 그래서 트로이 전쟁은 다만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Trojan war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기원전 12세기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의 전쟁.

 

목차
전쟁의 원인
전쟁의 경과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 전쟁의 역사적 실존 여부


전쟁의 원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경과

 

그리스 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 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폈는데, 여기에 속아 넘어간 트로이 군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였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나와 성문을 열어 주었고 그리스 군이 쳐들어와 트로이 성은 함락되었다.


트로이의 목마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하여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만들어졌으나 그중에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만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하였다.

 

트로이 전쟁의 역사적 실존 여부

한편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허구적인 신화로 취급하는 풍조가 강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 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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